‘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인류가 사유하기 시작할 때부터 끊임없이 던진 근원적인 질문이다. 우리는 역사와 문명의 발전으로 유례없이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일시적이거나 세속적 명예라는 추상적 환영에 이끌려 자신을 기만하고 사회적 현실을 오인하며 살아간다. 이들은 사회적 행위자들이 형성한 특정한 삶의 ‘장(場, field)’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인생 게임에 깊이 몰두하므로 그 규칙과 결과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 이때 무의식적으로 내면에 형성되는 집단적 신념 체계인 ‘도착적 믿음’에 매달려 살아간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라는 명제를 통해 존재론적 인식론적 관점에서 인간의 도착적 믿음이 어떻게 지배적 합리화를 경험하는지 성찰했다. 그는 우선 인간이 세계를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성이 있다고 보았다. 또한, 사회적 조건과 그 안에서 지배가 작동하는 방식을 깊이 탐구했다. 첫째,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적 세계의 질서, 가치, 그리고 규범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은 오랜 시간 학습과 내면화 과정을 통해 습득한 결과로, 의식적인 질문이나 비판 없이 수용된다. 이러한 도착적 믿음은 특정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지배의 합리화’라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한다.
두 번째로, 인간의 ‘지배 관계’는 종종 그 자체로 인식되기보다, 자연스러운 질서, 능력의 차이, 또는 운명적인 것으로 ‘오인(misrecognition)’되곤 한다. 피지배자들은 자신을 지배하는 구조를 의식적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심지어 그 구조를 내면화하여 스스로 자신을 제약하거나 지배에 동조하는 경향성을 보인다. 이것이 ‘상징적 폭력’의 핵심 메커니즘이다. 지배는 강제력보다는 상징적 폭력을 통해 합리화되고 정당화된다. 지배의 합리화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져 실천 감각이 약화 될 때, 결국 지배는 체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지배의 합리화로 형성된 사회적 구조와 무의식적 지배 구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비판적 성찰과 자율적 실천의 가능성에 대한 인식론적 전환이 필요하다. 사회적 세계의 자명성이나 그로 인한 무의식적 지배에 익숙한 채 살아가는 상징적 폭력을 극복할 수 있는 생성적 구조이자 사회적 행위를 향한 원리가 바로 ‘아비투스(Habitus)’다. 아비투스는 의식적 학습이라기보다는 무의식적이고 반복적인 실천, 즉 ‘몸을 통한 학습’을 통해 형성되며, 이는 특정한 장(field)에서 주어진 상황에 대해 적절하게 반응하고 행동하는 ‘실천 감각’을 부여한다. 이러한 아비투스를 통한 비판적 성찰은 불평등한 사회 질서가 단순히 강제력에 의한 것이 아닌,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되도록 만드는 과정을 극복하는 데 기여하며 ‘구별 짓기’의 메커니즘을 갖추게 한다.
개인이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경험하는 불평등은 재생산된다. 이것으로부터 해방될 방법이 바로 비판적 성찰이라는 인식론적 접근이다. 첫째, 사회학적 비판 역할의 필요성을 주목해야 한다. 우리 시대에 넘쳐나는 학문적 지식 생산을 넘어선, 실천적 목적을 가진 사회학적 이해가 필요하다. 둘째로, 비판적 성찰은 자율성 회복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먼저 자신의 아비투스가 사회적 조건에 의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행동과 인식을 제약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그때 개인은 비로소 주어진 조건에 대한 맹목적 순응이 아닌, 상대적 자율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한다. 마지막으로, 자율성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특정한 사회적 지배 아래 있는 것이 자연스럽게 여겨지지만,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때 피지배자들은 이해한 것을 통해 변화를 추구하는 지향성을 갖게 된다.
우리 사회는 외형적으로 큰 발전을 이루었지만, 여전히 많은 개인이 내면화된 지배구조 속에서 진정한 자율성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T. S. 엘리엇이 "우리가 경험은 있으나 의미는 놓쳤으니 의미에 접근하면 경험이 회복된다"라고 일갈했듯이, 우리에게는 중세인들의 인간 관찰을 넘어, 현대 사회의 복잡한 ‘의미망’을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비판적 상황 인식과 상대적 자율성 확보 노력이야말로 천성적으로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이 제2의 천성으로서의 의미망을 짜는 길이 될 것이다.
차종관 세움교회 목사 전 성결대 교수



AI기자 요약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