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조문 왔는데 어디 있니?" "서울 집에 있어" " 어머니 빈소 안 지키고?" " 그럴 일이 있어, 나중에 전화할게."

동창 녀석이 모친상을 당해 조문을 갔는데 보이지 않아 전화를 했더니 서울 집에 있다는 말을 듣고 당황했습니다. 며칠 후, 통화를 하고나서야 전후사정을 알 수가 있었지요. 4남매 중 셋째인 친구네 집은 우리 동네에선 제법 잘사는 집이었습니다. 셋째인 친구를 서울로 유학 보냈을 정도였지요. 논밭이 많으면 시골에선 나름 부자 집으로 통했습니다. 수년 전, 고향마을에 전철역이 생겼지요. 그 후, 역세권 개발이 진행되면서 논밭이 수용되었고 보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형이 모두 가로챘다는 거지요. 그날 그 문제로 다투고 집으로 돌아가 버린 겁니다.

성남시에 사는 고(故) 홍계향 할머니 가족은 장례를 마친 후, 의미 있는 결정을 했습니다. 어머니가 노점상으로 마련한 집을 매각해 경기도 사회복지 공동모금회에 기탁하고 어머니를 아너 소사이어티회원으로 등록한 거지요. 노점을 하면서도 복지회관에서 청소봉사하고 독거노인 도시락배달봉사를 한 어머니의 뜻을 기린 것입니다. 장례가 끝나면 유산상속과 조의금 배분문제를 둘러싸고 신경전을 벌이는 상황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지요. 부천에서도 부친장례를 치룬 형제들이 유산을 사회복지 공동모금회에 기탁하고 아버지를 아너 소사이어티회원으로 등록했습니다.

평생기부를 실천한 이들의 정신은 세대를 넘어 이어지지요. 고(故) 정진경씨의 자녀들은 평소 나눔을 몸소 보여주신 고인의 정신을 기린다며 1억 원을 아버지 이름으로 기부했습니다. 파주에서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아너 소사이어티회원이 등장했지요. "개인적으로 알려지는 것보다 기부참여를 망설이는 분들에게 작은 동기가 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경주의 명문가 최 부자 댁의 이웃에 대한 배려와 나눔의 정신적 유산은 오늘날에도 금과옥조처럼 전해지고 있지요. 부유한 가문을 넘어 사회적 책무와 도덕적 가치를 실천한 정신유산의 모범적 사례이고 교훈입니다.

살다보니 생각보다 부모 유산을 둘러싼 형제자매들의 다툼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돈이면 안되는 게 없다는 ‘황금만능주의’에서 비롯된 사회적 현상입니다. 사이좋게 잘 지내던 가족들이 유산배분 문제로 다투고 풍비박산(風飛雹散)난 경우를 종종 보았지요. 가진 것은 넉넉했지만 정신적으론 부족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들이 돈을 모아서 부모명의로 아너 클럽에 가입하는 건 가진 게 많기 때문이 아니지요. 살아생전 양보하고 배려하고 나눔을 행하는 부모님의 정신이 스며들었기 때문입니다. 정신유산이 중요하다는 걸 방증(傍證)해주는 일이지요.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철학과 가치관은 벼슬이나 재산보다 소중합니다. 벼슬이나 재산은 대를 이어나가는 게 어렵지요. 부모가 벼슬했다고 자식도 당연히 벼슬을 하거나 재산을 온전히 보존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정신유산은 다르지요. 한솥밥을 먹으며 부모에게 보고 배운 게 삶의 철학과 가치관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생각은 달라도 어떤 삶이 가치 있는 삶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지요. 저도 살면서 가진 게 부족해 마음 고생한 일이 한 번도 없었다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결코 초라하다거나 부끄럽다는 생각을 해본 일이 없지요.

직장문제로 주말부부가 된 며느리와 두 명의 손주가 우리 집에서 11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물질적으론 부족한 게 있었겠지요. 그래도 손주들이 바르게 자라도록 정성으로 보살핀 건 가치 있는 일이었습니다. 돈 버는 일과는 비교대상이 아니고 바꿀 수도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지요. 넉넉하진 않았지만 오랜 세월 소년소녀가장을 돕고 다양한 봉사와 기부를 하며 살아온 것도 말없는 교훈이 되었을 겁니다. 재산보다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정신유산을 물려주는 사람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홍승표 전 경기관광공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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