⑨봉선사의 두 말사, 묘적사와 보광사

묘적산과 묘적사 원경. 주수완
묘적산과 묘적사 원경. 주수완

조계종은 전국을 25개의 교구로 나눴는데, 그중 마지막 제25교구는 경기북부 지역을 담당하며 그 중심에는 교구 본사인 봉선사가 있다. 봉선사는 아름다운 정원과 연못, 쉬면서 즐길 수 있는 카페, 그리고 수많은 문화유산으로 남양주의 대표적 명소로 이미 자리잡았다. 창건은 고려 전기에 활동한 탄문 스님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조선 전기에 세조를 기리기 위한 원찰이 되면서 지금과 같은 큰 사찰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남양주에 간다면 제일 먼저 들려봐야할 사찰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남양주에는 봉선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반에게는 봉선사만큼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아름다운 사찰들이 많다. 특히 봉선사의 말사인 묘적사와 보광사는 말사 중에서도 우선적으로 방문해보시길 추천드리는 절이다.

묘적사의 정문인 무영루. 주수완
묘적사의 정문인 무영루. 주수완

◇원효대사가 세운 묘적사, 묘한 고요함 찾아= 묘적산 묘적사는 절이 위치한 묘적계곡이 요즘 핫플레이스가 돼 절로 올라가는 길이 엄청 막히고, 또 주차하기도 힘들다는 뉴스도 접한 터라 염려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가기로 한 날에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기 때문인지 계곡에 그다지 피서객이 많지는 않았다. 대신 묘적사에 도착할 때쯤 예보대로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이어 빗방울까지 조금씩 날리기 시작해서 사진 찍을 일이 걱정이었는데, 다행히도 빗줄기는 잠깐 내리고 이윽고 적당한 햇살이 비추기 시작했다. 하늘이 돕고 있는 것 같은 묘한 느낌. 그래서 묘적사일까? 묘적, 묘할 묘(妙), 고요할 적(寂)이다. 묘한 고요함이 무엇일까 찾아보기로 했다.

묘적사는 원효대사께서 세운 절이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원효대사가 세우신 절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으레 지어낸 얘기로만 간주한다. 원효대사가 세웠다는 절이 세상에 너무 많은 까닭이다.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석굴이 있는 절이라면 원효대사와 실제로 연관됐을 가능성을 한번 생각해볼 수 있다. 묘적사도 그렇다. 원효대사는 석굴수행 매니아셨던 것 같기 때문이다.

무영루 아래를 지나면서 본 묘적사 경내. 주수완
무영루 아래를 지나면서 본 묘적사 경내. 주수완

묘적사 절 앞에 서면 우선 무영루가 펼쳐져 있다. 원래는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등의 문 다음에 이런 누각이 있는데, 현재는 무영루가 모든 문의 역할을 도맡아 하고 있다. 그리고 알고보니 현재 중심 법당인 대웅전이 중창불사 중이라 무영루가 임시로 대웅전 역할까지 하고 있다. 무영루라는 이름도 흔치 않다. 그림자가 없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사물은 그림자를 남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데 그림자가 없다고는 굳이 말하지 않는다. 사물이 있음에도 그림자가 없을 때라야 그림자가 없다고 할 것이다. 있으나 존재하지 않음, 또한 존재하지 않지만 있음, 나아가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님이라는 의미가 곧 무영의 의미 아닐까? 다시 말해 있음과 없음이 둘이 아니라는 뜻이니 곧 보통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불이문(不二門)의 또다른 이름이 아닐까 한다. 없을 무(無)의 아래 점 네 개인 불 화(火)를 수풀 림(林)으로 쓴 것도 흥미롭다. 원래 불 화(火)의 의미가 林자였다고 한데서 착안한 것인데, 늘 산불이 날 것을 우려했던 산사에서는 불 화변 대신 원래의 林자를 쓰는 것이 더 좋은 착상이 아니었을까 이해가 된다.

대웅전에서 바라본 묘적사 경내. 주수완
대웅전에서 바라본 묘적사 경내. 주수완

◇장욱진 그림 보듯 아름다운 풍광= 무영루 아래를 지나 본격적으로 경내에 들어선다. 정면에는 묘적사의 오랜 역사를 간직한 팔각다층석탑이 멀리 보이고, 그 뒤로 대웅전이 있어야 하지만, 현재는 중창 중인 대웅전의 중심 기둥과 그 안에 모셔진 석불상만 보인다. 팔각대층석탑은 우리나라에 흔치 않다. 대표적인 예로 월정사 팔각다층석탑이 있고, 다음으로는 남양주 수종사의 팔각오층석탑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이들은 각각 국보, 보물로 지정돼 있는데, 수종사와 같은 남양주에 있는 팔각다층석탑인 묘적사탑은 아직 경기도 문화유산에 머물러 있다. 수종사탑은 그 안에서 조선 전기의 금동불상이 다량으로 출토되면서 조선 전기에 조성된 것이 확인됐는데, 묘적사탑은 아직 명확한 조성연대가 확인되지 않아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수종사탑은 5층, 월정사탑은 9층인데 반해 묘적사탑은 7층이라는 점에서 팔각다층석탑의 다양한 층수를 보여주는 보물급 탑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맨 위에는 삼각형 모양이 새겨진 꼭대기 장식도 남아있는데, 이 모양은 수종사탑과 거의 유사해 세워진 시기도 조선 초기로 비슷할 것 같다.

중창 중인 대웅전 자리에 올라 정면을 바라보니 마치 남양주에서 활동한 화가 장욱진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특히 ‘밤과 노인’ 속에 등장하는 두 그루의 나무와 기와집이 혹시 묘적사를 모델로 그린 것이 아닐까 싶은 정도다.

묘적사 보리수 잎사귀. 주수완
묘적사 보리수 잎사귀. 주수완

대웅전 옆으로 난 석굴로 올라가는 오솔길 입구에는 귀한 나무 보리수가 우뚝 솟아있다. 보호수로 지정된 아름다운 나무인데, 옛날에 이 보리수 열매로 염주를 만들어 소원을 빌었더니 소원이 모두 이뤄지더라는 전설이 전한다. 그렇다고 열매를 무단으로 따가지는 말자. 소원을 들어주는 나무가 꼭 열매로 염주를 만들어야만 소원을 들어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으셨다고 해서 유명한 나무인데, 인도에 가보면 보리수 잎의 특징은 끝이 뾰족한 하트모양이다. 묘적사의 보리수잎을 보니 실제로 그렇다. 나무 한 그루가 이렇게 사람을 부처님의 나라 인도로 인도한다.

나한전 석굴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 주수완
나한전 석굴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 주수완

◇원효스님 수행하던 석굴일까= 이제 옆으로 난 오솔길 계단을 따라 석굴을 찾아보기로 한다. 석굴은 나한전으로 조성돼 있는데, 계단을 올라 자그마한 대문을 통해 들어서니 산령각, 즉 산신각과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원래는 석굴을 보러 올라온 것이었는데, 비로소 그곳이 "명상하기 딱 좋은 날"임을 알게 해주는 핫플레이스임을 알았다. 석굴 안에 앉아 동굴 밖을 바라보는 풍광도 일품이고, 석굴 안이라 시원하기도 하다. 그뿐인가, 바로 옆으로 묘적계곡의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우렁차게 들린다. 아, 그런 것이었구나. 묘적사의 적막함은 그냥 적막함이 아니라 계곡의 물소리가 우렁차게 흐르면서 다른 잡다한 소리들은 안 들을 수 있게 해주는 기묘한 고요함이었던 것이다. 부처님 말씀도 그렇지 않을까? 세상의 번뇌스러운 이야기들을 그저 무심하게 흘려들을 수 있게 만들어주시는 설법을 하시니, 곧 이 계곡 물소리와 같지 않은가. 원효스님이 실제 이곳에서 수행을 하셨는지 안 하셨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만약 이 멋진 석굴에서 수행을 안 하셨다면 원효스님 손해일 뿐이다.

잠시 석굴에서 원효스님이 된 것처럼 수행하는 척 하다가 이제는 묘적사에서 유명한 템플스테이 장소로 가보기로 한다. 절이 이렇게 예쁘니 템플스테이 숙소도 예쁘겠지 하는 기대감이 생겼다. 종무소에 물어보니 바로 산신각 아래로 보였던 건물들이 템플스테이 숙소라고 한다. 그 앞에는 연못까지 있어 자연스레 연못방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구경을 하고 있으려니 왜 묘적사 템플스테이가 유명한지 알 수 있었다.

묘적사에서 내려오면서 드디어 요즘 각광을 받고 있다는 묘적계곡의 묘적폭포에 들렀다. 절로 오르내리는 길 옆에 바로 있어 부담없이 방문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물론 사람들이 몰리면 피곤하겠지만 그날은 사람도 많지 않아 물놀이 복장을 챙겨오지 않은 것이 무척이나 후회스러웠다. 폭포 아래에 몸을 던지는 피서객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즐거워한다. 이렇게 폭포 아래에서 물폭탄도 맞을 수 있고, 그 앞에는 비교적 넓은 못이 형성돼 몸도 발도 담글 수 있으니 그야말로 천연 워터파크다. 늘 놀 준비가 돼 있어야 했는데, 필자는 너무 준비성이 없었다. 폭포에서 조금 올라가면 카페도 있으니 놀다 지치면 쉬었다 또 놀기도 그만이다.

천마산 보광사 전경. 주수완
천마산 보광사 전경. 주수완

◇불교는 늘 중생과 함께=만약 필자처럼 물에 들어갈 준비가 안 된 분이라면 근처의 봉선사 말사 한 곳을 더 추천드리고 싶다. 남양주 천마산 기슭의 보광사다. 차로 30분 정도 거리인데, 몇 가지 점에서 무척 흥미로운 절이다. 우선 이곳에도 또 하나의 팔각칠층석탑이 세워져 있다. 다만 양식은 묘적사나 수종사탑과는 다른데, 이런 탑은 대체로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기만 하고 정확한 내력이 전하지 않는다. 그런데 보광사의 이 탑은 조선 말기의 명문가 집안 출신으로 영의정을 역임했고, 고종의 스승이기도 했으며, 그의 양아들 이석영이 막대한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매진한 것으로 유명한 귤원 이유원(1814~1888)이 세웠다고 전해져 대략적인 조성 연대를 알 수 있다. 최소한 그가 사망하기 전인 1888년 이전에 세워진 것인데, 그렇다면 이러한 석탑의 연대를 조선말로 올려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기준작이 될 수 있다. 이유원이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기원하며 세웠다고 하니 서울 서대문의 독립문과 같은 의미가 담긴 탑이라 하겠다. 보광사에 가보니 절 한쪽의 높은 언덕 위에 귀여운 돌부처님과 함께 솟아있다. 바닥이 바위로 돼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바위가 영험한 것으로 생각돼 이 위에 탑을 세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왜 남양주에서 이런 팔각형 탑들이 유독 유행했던 것일까 더 연구가 필요하다.

보광사 소나무. 주수완
보광사 소나무. 주수완

보광사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수령 300년 이상으로 생각되는 소나무다. 마치 겸재 정선이 그린 노송도에 등장하는 소나무의 축소판 같은 아름다운 나무다. 묘적사에서 본 보리수와 더불어 사찰 나무 기행도 이렇게 재미있구나 느꼈고, 그 나무가 지닌 역사가 또한 사찰의 역사이기도 함을 보광사 주지스님의 설명을 들어 알 수 있었다. 나뭇가지가 부러질까봐 정성스레 막대기로 받쳐둔 스님의 정성도 감동이었다.

보광사로 올라가는 계곡도 묘적계곡처럼 아름다운데, 다만 직접 들어갈 수 있는 계곡은 아니다. 이 계곡 여러 곳에 사실은 매우 중요한 바위글씨가 곳곳에 새겨져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그 유명한 추사 김정희가 쓴 바위글씨가 세 곳에 있는데, 그 중의 두 점은 현재 펜스 너머에 있어 잘 보이지 않지만, 그중 하나인 ‘자련대상(紫蓮臺上)’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마 이 계곡도 잘 정비된다면 멋진 서예 답사 기행 코스로 핫플레이스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명사들이 이곳에 글씨를 남겼다는 것은 곧 이 계곡이 명소였음을 알려주는 증거가 아닐까?

자연은 가장 큰 이벤트다. 묘적사의 묘적계곡과 보광사의 가곡천(벽파동천)은 누구나 와서 참여할 수 있는 자연의 축제다. 이런 곳에 자리잡은 사찰은 불교가 속세를 버린 것이 아니라, 늘 중생과 함께 있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준다.

주수완 우석대학교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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