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숙지산 등산로는 눈감고도 갈 만큼 익숙하다. 벌써 16년째 숙지산 기슭에 살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런데 며칠 전 낯선 길 하나를 발견했다. 약수터 옆으로 난 작은 오솔길이다. 늘 물만 마시고 큰길로 내려오던 터라 그 길은 얼핏 보긴 했지만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었다. 왠지 그날은 그 길로 가보고 싶었다. 용기를 내 몇걸음 발을 들여놓는데 금세 후회가 밀려왔다. 늘 다니던 등산로보다 좁고 거칠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울퉁불퉁하고 가파르기까지 했다. 돌아갈까? 잠시 망설였지만, 기왕 들어온 거 한번 가보기로 했다.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내딛는데 곳곳에 흙을 다져 계단처럼 만들어 놓은 흔적이 보였다. 누군가 지나간 자국이었다. 나는 처음 가본 길이었지만 이미 여러 사람이 다녔던 모양이다. 얼마쯤 내려갔을까, 익숙한 등산로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 길은 16년간 모르고 지냈던 샛길이었다. 아, 길이 이렇게도 통하는구나. 순간 조금 허탈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이 산을 오르내렸건만 나는 한 번도 달리 가보려 하지 않았다. 산을 내려오며 문득 ‘늘 다니던 곳에도 새로운 길이 있는데, 세상엔 내가 모르는 통로와 가능성이 얼마나 많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늘 하던 대로 하려고 한다. 매일 반복되는 루틴, 익숙한 업무 방식, 오랫동안 유지돼온 정책과 시스템까지. 긴 시간 다듬어진 가장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방법은 실패 확률을 줄여준다. 하지만 바로 그 안정감과 익숙함이 가장 무서운 정체(停滯)를 만든다. 새로운 관점이 배제되고, 시도는 기피되며, 변화의 타이밍은 계속 뒤로 미뤄진다.
대표적인 사례가 코닥이다. 필름 카메라의 대명사였던 코닥은 디지털 기술 부상을 일찌감치 파악했지만 기존 필름 사업이 흔들릴 것을 우려해 사업 전환을 계속 미뤘다. 심지어 자사가 보유한 디지털 카메라 특허조차 외면한 채 당장의 수익에만 매달렸다. 결국 2012년 파산 보호를 신청하며 거대한 필름제국의 아성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야후 역시 마찬가지다. 인터넷 포털의 선두주자였지만 검색과 콘텐츠 중심 사업에만 집중한 나머지 구글·페이스북·유튜브 등 차세대 플랫폼의 부상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이후 여러 차례 결정적인 인수 기회를 놓쳤고, 자사의 강점을 살리지 못한 채 점점 쇠퇴했다. 결국 2017년 버라이즌에 인수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반면 기존 성공방식에 안주하지 않고 위기를 기회로 바꾼 기업들은 미래로 나아갔다. 넷플릭스는 DVD 대여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도 스스로 그 모델을 해체하고 대여가 필요 없는 스트리밍 플랫폼으로 전환을 감행했다. 이후 콘텐츠 제작에 직접 뛰어들며 글로벌 미디어 시장의 지형을 바꿨다. 애플은 하드웨어 기업의 틀을 넘어 아이폰과 앱스토어를 중심으로 소프트웨어·콘텐츠·클라우드를 아우르는 생태계를 구축해 세계 시가총액 1위 기업으로 성장했다.
국내 사례도 있다. 삼성전자는 가전·부품 중심의 전통 제조기업이었지만 스마트폰, 반도체, AI 기술을 아우르는 첨단 기술기업으로 체질을 바꾸며 글로벌 IT산업을 이끄는 리더가 됐다. LG화학 역시 석유화학 중심의 비즈니스에서 전기차 배터리로 대표되는 친환경 에너지 산업으로 중심축을 이동시켰고, 세계 배터리 시장에서 주도권을 확보하며 새로운 성장 궤도에 올라섰다.
정답이 정해지지 않은 시대다. 정해진 방식이 곧 낡음이 돼버리는 디지털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낯섦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세다. 가보지 않던 길, 참석하지 않던 모임, 뜻밖의 질문들과 마주하는 순간들이 변화의 씨앗을 만든다. 불편함과 우연, 부딪침과 재구성이 혁신의 모티브를 제공한다. 구글은 ‘업무 시간의 20%를 본업과 무관한 프로젝트에 투입하라’는 규정으로 직원들을 낯선 영역으로 유도하고 있다. 이런 시도 속에서 지메일, 애드센스 같은 대표적인 서비스가 탄생했다.
이제 하던 대로 하던 일을 멈춰 보자. 가던 대로 가면 예측 가능하고 안정적이지만 늘 그만큼밖에 못 간다. 당연히 여기던 방식을 뒤집어 보고 같은 질문에 새로운 방식으로 답해보자. 그 작은 움직임 속에서 우리가 찾고 있는 혁신이 꿈틀댈지 모른다.
민병수 디지털뉴스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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