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우가키 총독 처단 시도했던 조안득

조안득. 사진=동아일보 1936년 8월 18일자
조안득. 사진=동아일보 1936년 8월 18일자

◇가난한 노동자로 태어나 세상을 놀라게 하다
일제의 엄혹한 식민지 통치에 맞서 우리 민족이 국내외에서 끊임없이 독립투쟁을 전개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때로는 저명한 민족지도자가 지도했는가 하면 때로는 대중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 ‘세상을 놀라게 할’ 정도의 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후자를 대표하는 인물은 1936년 우가키 총독의 처단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친 조안득(曺安得)이라 할 수 있다.

조안득은 1910년 11월 16일 본적지인 수원군 수원읍 매산리 14번지의 빈한한 가정에서 3형제 중 막내로 출생했다. 수원공립보통학교 4년을 수료하고, 수원의 곤도(近藤), 신동양 등의 인쇄소에서 직공으로 일했다. 1930년 무렵 그의 큰형 조수복은 수원노동조합 쟁의부장, 그는 인쇄부장으로 활동했다.

일제 경찰 문서에 따르면 조안득은 ‘조안드리아노’라는 세례명까지 받은 성공회 신자였다.

수원지역의 성공회 신자 중에는 수원지역 3·1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김노적과 박선태가 있었다. 이들은 1920년대까지 수원지역 민족운동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김노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다고 하며, 박선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해 구국민단을 조직해서 일제와 투쟁했다.

그런데 조안득은 수원노동조합 등 수원지역의 대중단체에 가입하면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벗어나 사회주의적 신념을 갖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일제의 문서에 따르면 그는 일제 경찰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감시받던 임범진, 이종화와 친했다고 한다. 1929년 11월 현재 임범진은 수원노동조합 인공반위원장, 이종화는 인공반 위원이었다. 이로 볼 때 조안득과 임범진, 이종화는 인쇄공이라는 직업적 동질감을 갖고 친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박승극, 변기재, 공석정 등 수원지역의 사회주의 지도자들과 교유하게 됐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는 성공회에서 인연을 맺은 김노적과 박선태와 박승극, 변기재, 공석정 등 사회주의자에게 민족의식과 계급의식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조안득이 일했던 용일양조장. 사진=동아일보 1936년 8월 18일자
조안득이 일했던 용일양조장. 사진=동아일보 1936년 8월 18일자

◇수원을 떠나 경성으로
1931년 빈곤한 경제적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안득의 가족들은 경성으로 이사했다. 조안득은 이 사건을 계획한 인물들이 함께 근무하던 마포의 용일양조장, 큰형 조수복은 호마레(넙적보리)장유회사, 작은형 조천복은 지방행정학회의 인쇄공으로 취직했다.

어머니와 그의 아내는 용일양조장의 배달부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장사를 했던 것으로 볼 때 모든 가족이 생계를 위한 경제활동에 종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조안득은 하루에 96전의 일당을 받고 있었다. 다른 형제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보여 그의 집안은 여전히 경제적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조안득이 일제 경찰에 체포된 뒤 그의 아내는 “남편이 저리된 후로는 굶기를 밥 먹듯” 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최영진,구승회, 윤학수. 사진=동아일보 1936년 8월 18일자
최영진,구승회, 윤학수. 사진=동아일보 1936년 8월 18일자

그런데 우연인지는 모르겠으나 조안득이 취직한 용일양조장에는 각지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잠입한 인물들이 있었다.

이들이 바로 ‘우가키 총독 암살미수 사건’의 관련자들로, 주범인 조안득을 비롯해 최영진, 구승회, 윤학수, 이금진, 인진명, 윤낙삼 등이다. 이중 조안득·최영진·윤낙삼·구승회·이금진은 용일양조장 직원이었고, 이금진과 구승회는 사회주의자였다. 특히 이금진은 조안득에게 사회주의적 교양을 강화했던 인물이다.

이 때문인지 일제 경찰은 ‘우가키 총독 암살 미수사건’이라 명명하고, 이금진을 지도했던 강목구·정태옥·김태호를 상부로 한 공산주의 조직 사건으로 확대하려 했던 것 같다.

이금진. 사진=동아일보 1936년 8월 18일자
이금진. 사진=동아일보 1936년 8월 18일자

이금진은 1932년 11월 강목구, 정태옥 등이 주도한 고려공산청년회재건운동 관계자 김태호(김태식)의 지도하에 같은 해 10월 무렵 채일석을 책임으로 한 사회주의독서회그룹에 가입했다.

구승회는 경기도 광주 출신으로서 석혜환이 지도했던 광주협동조합의 간사, 광주공산당협의회 교양부 책임자였다. 그는 고향인 광주에서 석혜환·정영배·구희서·구완서 등과 함께 공산주의 서적을 읽고 공산주의 의식을 함양했다. 특히 이금진은 1935년 용일양조장에서 임금 인상을 목적으로 한 동맹파업을 선동하기도 해 그가 용일양조장을 기반으로 한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이를 통해 조직 활동을 전개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세 번에 걸친 총독 처단 시도
그러면 조안득이 우카키 총독 처단에 나선 경위를 살펴보자. 일제 경찰에 따르면 조안득은 이금진에게서 민족의식의 앙양과 공산주의 사회 실현에 관한 교양을 받은 후 친형인 조수복과 조천복의 실업에 따라 가정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자본주의 경제기구에 의문을 품게 됐다고 한다.

1935년 9월 무렵 남산 국기 게양탑 근처에서 경성부내를 조망했는데, 일본인과 조선인 거주지역의 상황이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는 것을 목격한 후 일제의 식민통치에 분노해 안중근 의사을 모방, 조선 총독의 처단을 기도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계획을 세운 조안득은 이금진과 상의하고, 앞에서 본 인물들을 포섭해 처단 활동을 전개했다. 흥미로운 점은 조안득·이금진·구승회를 제외하고는 사회운동에 참여한 적이 없는 인물들이 참여했다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1920~30년대를 거치면서 대중운동이 활성화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조안득의 우가키 총독 처단 활동은 3차에 걸쳐 전개됐다.

제1차 시도는 조선 총독의 동선을 파악하는 활동이다. 이를 위해 그는 각종 신문을 탐독했다. 1935년 10월 14일 사단대항연습을 참관한 후 귀경하는 우가키 총독을 처단하기 위해 폭탄을 제조하려 했으나 도화선을 준비하지 못했고, 이틀 후인 10월 16일 고관들이 동대문 밖을 통해 이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 통로인 용일양조장 동부지점에서 처단하려 했으나 실행하지 못한 것이다.

제2차 시도는 단독으로 조선총독을 처단하는데 한계를 느낀 조안득이 최영진, 구승회, 윤낙삼 등을 동지로 영입하고 이들과 함께 거사를 계획해 실행에 옮긴 사건이다. 이 단계에서 폭약제조법을 알고 있던 인진명을 포섭해 그에게서 폭탄물제조법과 다니너마이트와 도화선을 구해 폭발물을 제작했다.

조안득이 거사를 계획했던 경성역 모습.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조안득이 거사를 계획했던 경성역 모습. 사진=서울역사박물관

1935년 11월 17일 우가키 총독이 경성역으로 귀경한다는 보도를 접하고 경성역으로 갔으나 총독의 일정이 미뤄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귀가 후 폭발물을 보여주며 구승회를 포섭, 18일에 재차 실행하려 했으나 안개가 깊게 끼고 경계가 엄중했을 뿐만 아니라 우가키 총독이 예정과 달리 제2플랫폼에서 바로 자동차를 이용해 남대문 방면으로 이동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제3차는 조안득이 최영진과 윤낙삼을 포섭해 진행됐다. 그들은 우가키 총독이 온양온천에서 출발해 12월 14일 오후 2시 52분에 경성역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신문 보도를 통해 접했다.

조안득은 당일 2시 5분 폭발물 3개를 휴대하고 자전거로 경성역에 가서 우가키 총독 처단 장소로 남대문통 5정목 세브란스병원 통용문에서 15m 정도 떨어진 철책 부근에서 폭탄을 투척할 것을 계획했으나 총독이 귀로를 바꾸고 경계가 엄중해 이마저도 실패했다.

이후 그는 1936년 1월 1일을 맞아 총독이 조선신궁을 참배할 것을 예상하고 신궁 근처에 방화해 경계 경찰을 동요시키고 그 사이에 총독 처단을 계획했으나 12월 28일에 검거되고 말았다.

그가 검거된 배경에는 용일양조장 배달부와 용일양조장 부근 이발소에서 풍문을 들은 경찰의 활동이 있었다.

조안득이 거사를 계획했던 남대문통 5정목 거리.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조안득이 거사를 계획했던 남대문통 5정목 거리. 사진=서울역사박물관

◇ 끝나지 않는 독립 투쟁 정신 보여준 조안득
비록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으나 1935년 조안득의 우가키 총독 처단 미수사건은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중일전쟁을 준비하면서 식민지 조선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하는 시기에도 국내에서 독립투쟁의 움직임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그 중심인물이 일제 경찰이 주목하지 못했던 일반 민중이었다는 점은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가 얼마나 크고 광범위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조안득을 비롯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독립투사를 하루라도 빨리 발굴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다시 언급해야 하는 처지가 아쉽다 하겠다. 참고로 조안득은 2010년 애국장에 서훈됐다.

조성운 역사아카이브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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