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용금 이자채무의 소멸시효가 완성된 상태에서 그것도 모른 채 이자를 갚게 되어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민원인은 채권자로부터 4차례에 걸쳐 총 2억 4천만 원을 차용하였는데 민원인이 채권자에게 지급한 이자채무 중 1천800만 원은 소멸시효가 완성된 상태에서 변제되었다. 이후 민원인 소유 부동산에 대하여 실시된 임의경매에서 작성된 배당표에 관하여 민원인은 위 1천800만 원은 이자채무의 소멸시효가 완성되었으므로 채권자에 대한 배당액이 실제 대여원리금을 초과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배당표 경정을 구하는 배당이의의 소를 제기하였다.
이 사건의 쟁점은 채무자가 시효완성 후 채무를 승인한 경우 시효완성을 알고 그 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지의 여부이다. 위 사건에 관하여 하급심은 민원인이 차용금 이자채무의 소멸시효가 완성된 상태에서 차용금채무 일부를 변제함으로써 차용금 이자채무에 관한 시효완성의 이익을 포기하였다고 판단하면서 민원인의 시효완성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위 하급심 판결은 종래의 대법원 판례에 따른 것인데 채무자가 시효완성 후 채무를 승인한 경우 시효완성의 사실을 알고 그 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본 논거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위 하급심 판결에 대하여 ‘대법원 2025년 7월 24일 선고 2023다240299 전원합의체 판결’은 원심을 파기·환송하면서 종전 대법원 판례를 변경하기에 이르렀으며, 그 이유는 후술한 바와 같다.
“종전 판례의 추정 법리는 시효완성 후 채무자의 채무승인으로부터 시효완성에 관한 채무자의 인식 및 그 시효포기에 관한 채무자의 의사표시를 추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추정 및 의사표시의 추정은 경험칙에 근거하여 인정되는 사실상의 추정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러한 추정은 경험칙으로 뒷받침되지 않거나 오히려 경험칙에 어긋난다. 시효완성에 대한 인식의 추정은 경험칙에 근거한다고 보기 어렵다. 시효완성 여부는 소멸시효 기간, 소멸시효 기산점, 소멸시효 중단 또는 정지 사유 등 다양한 요소에 따라 결정된다. 이러한 요소에 대한 판단은 때로 불명확하고 복잡하므로 단지 소멸시효기간이 지났다는 사정만으로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았다고 일반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았는지는 개별 사안의 여러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해야 할 문제이지 경험칙에 따라 일률적으로 추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 추정도 경험칙에 근거한다고 보기 어렵다. 시효이익 포기는 시효완성을 알고 있음을 전제로 하는 의사표시이다. 그런데 채무자가 시효완성으로 인하여 그 기산일을 소급하여 채무에서 해방되는 법적 이익을 누리게 된다는 점을 알면서도 그 이익을 포기하고 채무를 부담하겠다는 의사표시를 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보통의 채무자라면 이처럼 자신의 법적 이익을 스스로 포기하고 굳이 불리한 법적 지위를 자청할 가능성이 높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경험칙에 비추어 보면 시효완성 후 채무승인은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하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소멸시효 중단사유인 채무승인과 시효이익의 포기는 서로 구별되어야 하는 개념이다. 시효이익의 포기는 단순히 채무에 관한 인식을 표시하는 것을 넘어 자신에게 법적으로 보장된 시효이익의 포기라는 법적 효과를 의욕하는 효과의사의 표시가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채무승인과 뚜렷하게 구별된다. 뿐만 아니라 법원은 그동안 권리포기 등 중대한 불이익을 가져오는 의사표시는 엄격하게 해석해야 한다는 법리를 펼쳐왔다.”
살피건대, 소멸시효 제도는 권리자가 일정기간 동안 권리를 행사하지 않아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상태가 발생한 경우 일정한 요건 아래 권리를 소멸시킴으로써 법적 안정성으로 도모하는 제도이고 이 제도를 통하여 채무자는 소멸시효가 완성되면 채무의 부담에서 벗어나는 법적 이익을 누리게 된다.
그런데 종전 추정 법리는 시효완성 후 채무승인이라는 사정만 있으면 그 사정으로부터 시효완성 사실에 대한 인식과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를 추정하고, 채무자에게 이러한 추정을 번복할 부담을 부과한다. 이는 채무자를 본래 법이 예정하지 않았던 불리한 지위에 놓이게 하는 것이다. 또한 추정 법리는 대부업체나 추심업체 등이 시효완성 후 채무자에게 일부변제 등 채무승인 행위를 압박하거나 유도함으로써 시효이익을 포기하는데 악용되는 등 금융소비자의 이익을 침해할 우려도 있다. 따라서 종전 판례의 추정 법리가 부당하다고 한 이번 전원합의체 판결은 경제적 약자인 채무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경험칙에 부합하는 것이어서 크게 환영할만 하다.
위철환 전 대한변호사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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