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이병! 너는 각개전투장 가지 말고 대기해.”

논산 훈련소 훈련병 때의 일입니다. 중대본부 서무계 김 상병이 ‘차트 보고서’ 쓰는 일을 하자고 했지요. ‘종합각개전투훈련’은 힘든 시간이라 잘됐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종일 글씨를 쓰는 일은. 얼핏 보기와는 달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지요. 차라리 동료들과 훈련받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만 제 글씨가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훈련 기간에 몇 차례 더 차출돼 글씨를 썼지요. 자대에 배치된 후에도 차트 보고서 쓰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차트뿐 아니라 선임 병 ‘펜팔 편지’를 대필해줄 때도 있었지요. 회의서류 등을 만들 때는 속칭 가리방(등사판)글씨 쓰는 일도 전담했습니다.

가리방은 철필(鉄筆)로 긁어 쓴 기름종이를 등사판에 얹힌 다음 잉크를 묻혀 롤러로 밀어서 복사하는 인쇄기술이지요. 글씨가 선명하게 인쇄되도록 힘주어 쓰면서도 기름종이가 찢어지지 않게 해야 하는데 나름의 기술과 요령이 필요합니다. 손목에 일률적으로 힘을 줘야 하고 집중력도 필요한데 비교적 잘한다는 칭찬을 들었지요. 입대 전, 2년 가까이 면서기로 일하는 동안 철필 글씨를 도맡아 썼습니다. 덕분에 덤으로 술도 얻어먹었지요. 그렇게 글씨는 손에 익은 일이었으니 선임병사들이 놀란 건 당연했습니다. 군 생활 3년을 손마디에 굳은살이 두꺼워지도록 글씨를 쓰다 제대했지요.

제대 후 복직해서 경기도청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이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직원들 사이에 글씨 잘 쓴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덕분에 많은 사람이 선호하는 인사계로 배치 받을 수 있었지요. 인사계는 말 그대로 직원 인사에 관한 사항이 주요 업무이지만, 워낙 글씨 쓰는 일이 많은 부서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며칠씩 글씨만 쓰는 일도 있었지요. 그때, 거의 모든 서류는 국·한문 혼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글씨만 잘 쓴다고 해서 맡을 수 있는 일이 아니고, 한자도 알아야 했지요. 가끔 내무부에 차출되기도 했습니다. 글씨를 써주는 일이었지만, 업무 이해도도 어느 정도는 있어야 진행이 수월한 법인데 ‘내무부 전입’권유를 받을 정도였으니 인정을 받은 것이지요.

공직생활을 하면서 글씨 덕을 크게 봤습니다. 다른 부서의 차트 보고서를 써주면서 교분을 넓힐 수 있었던 것이 실력 이상으로 인정을 받게 한 계기가 되었지요. 도지사 비서실에 가게 된 것도 글씨도 잘 쓰고 신춘문예에 당선된 글 솜씨 덕분일 듯합니다.

아들이 군(軍)에 있을 때, 손 편지를 많이 보냈지요. 편지를 받은 아들에게 위안이 되었겠지만, 저 역시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스스로의 삶을 곧추세우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지요. 요즘은 손 글씨 자체가 세간의 화제로 떠오르는 세상입니다. 가끔 유명인사의 손 편지가 등장하지요. 기쁜 일보다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을 때, 사과문으로 쓰이곤 하는데 진심을 담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몸짓으로 보입니다. 저도 아내와 연애시절엔 손 편지를 많이 썼지요. 이젠 반성문(?) 쓸 때만 손 글씨를 사용합니다. 그리 살면서도 가끔 기념일에 아들, 며느리, 손주의 손 편지를 받으면 미소가 저절로 지어지지요.

겉모양보다는 그 글씨에 담긴 마음이 중요합니다. 생각의 깊이와 넓이, 인성까지 담겨 있다면 참으로 가치 있는 손 글씨이지요. 저는 펜이나 만년필로 공들여 글을 쓰면서 마음을 다스리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평생을 함께한 만년필을 물려줄 때가 다가오지요. 갈수록 손 글씨를 쓸 일은 줄어들 것입니다. 그래도 훗날, 아들 녀석이 저의 손때 묻은 만년필로 글씨를 쓰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지요.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 공들여 정성으로 글을 쓰며 몸과 마음을 다스리고 곧추세웠던 저를 떠올리며 여여(如如)하게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홍승표 전 경기관광공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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