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제3대 대통령을 지낸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은 평생에 걸쳐 카운티를 마을 단위로 분할 해 “마을공화국(ward republic)”을 구상했다. 그는 대통령 임기후에 말년까지 이를 버지니아 헌법에 명시하기 위해 개헌을 추진했으나, 기득권 세력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제퍼슨의 실패한 이 구상을 “잃어버린 보물”이라 부르며 안타까워했다.

제퍼슨이 마을공화국을 구상한 것은 버지니아 주지사 시절이다. 당시 카운티(군(郡)에 해당)는 규모가 너무 커서 주민이 직접 참여해 지역문제를 논의하여 해결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는 공화국의 출발점은 마을자치라고 보았다. 그래서 카운티를 더 작은 마을단위로 나누어 주민의 직접 참여와 자기책임의 자유공간을 미국 전역에 설치하려고 했다.

그에게 모델이 된 것은 뉴잉글랜드 지역의 타운미팅이었다. 인구 1~2천 명 규모의 마을에서 주민들이 모여 공공사무를 직접 결정하고 집행하는 제도였다. 제퍼슨은 이러한 마을공화국을 “시민의 학교”라고 불렀다. 주민들은 공동체 문제를 함께 논의하며 공공선을 실현하는 시민적 덕성을 체득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단위를 “기초공화국(elementary republic)”이라 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카운티공화국–주공화국–연방공화국으로 이어지는 다단계 공화국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제퍼슨의 구상은 과연 실패했을까? 필자가 조사해 본 결과, 그의 구상은 실패한 것이 아니라 점점 확대하여 실현되고 있다. 제퍼슨 이후 미국 전역에서 수만 개의 비자치 지역이 주민운동을 통해 카운티에서 독립하여 자치권을 가진 시 또는 타운 등으로 설립되었다. 최근에도 비자치 지역이었던 카운티소속의 샌디 스프링스(2005)와 던우디(2008) 등이 주민운동으로 자치권을 가진 시가 되었다.

반면 한국은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1961년 군사정변 직후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으로 자치 지역이었던 읍·면을 비자치 지역으로 만들었고, 1988년 개정된 지방자치법은 이를 확정하였다. 현재 한국의 기초자치단체(시·군·자치구) 평균 규모는 22만 명으로, 세계에서 최대규모가 되었다. 주민의 직접 참여는 불가능해지고, 주민은 지방정부의 정책을 소비하는 객체로 전락했다. 헌법 제1조 제1항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선언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고 말았다. 민주공화국의 첫 단추가 잘못 채워졌다.

풀뿌리 자치의 실종에 대한 비판이 거세자 이를 무마하려고 정부가 내놓은 것이 바로 ‘주민자치회’다. 정부는 2013년부터 그 시범 지역을 확대해 왔다. 현 정부는 이를 “본격 실시”하겠다고 국정과제로 채택했다. 그러나 이는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는 위험한 발상이다. 한국에서 풀뿌리 자치가 정착하지 못한 것은 주민자치회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기초자치단체의 규모가 지나치게 커서 주민의 직접 참여와 자기결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생겨난 구조적 문제다. 따라서 풀뿌리 기초공화국은 기초자치의 단위를 읍·면·동 수준의 규모로 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헌법상 지방자치의 주체는 지방자치단체이며, 이는 주민으로 구성된다. 따라서 지방자치란 곧 주민자치다. 읍·면·동의 주민자치회는 주민이 참여하더라도 공적 자치권이 없는 민간조직에 불과하고, 아돌프 가써가 경계한 “가짜 지방자치(Scheingemeinde)”이다.

진정한 민주공화국의 기초로서 풀뿌리 자치를 구현하려면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지방자치 선진국처럼 읍·면·동 단위의 자치를 복원해야 한다. 우선 자치의지와 자치역량을 갖춘 지역부터 자치권을 부여하여 풀뿌리 자치를 실시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야 한다. 현행법은 읍·면·동의 자치의 방법으로 ‘시(市) 설치’만 허용한다. 인구 5만 명이라는 요건은 턱없이 높다. 국제 수준에 맞추어 대폭 낮추고, 자치화의 통로도 ‘시’ 설치에 더하여 ‘자치 읍·면·동’의 설치를 추가해야 한다.

주민자치회에 의존하는 한, 한국의 풀뿌리 자치는 공허한 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다. 논에 피를 심어서 나락을 수확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제퍼슨의 마을공화국 구상과 미국의 시 설립 자치운동의 성과는 오늘의 한국에 실현할 수 있는 확고한 이정표가 된다.

이기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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