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서 엄마와 함께 있던 아이가 위인전 ‘퀴리부인’을 읽고 있었다. 코끝을 간질이는 가을 햇살 속, 책장을 넘기는 아이의 모습이 이상하게 오래 눈에 남았다.
“저 아이는 훌륭한 과학자가 되겠는걸.”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 아이의 엄마는 바랐을 것이다. 도전하고, 넘고, 이겨내는 삶을. 고난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사람이 되기를. 아이들이 읽는 위인전 속 주인공들은 대개 그런 사람들이다.
한글을 창제해 백성을 사랑한 세종대왕, 끝없는 실패 끝에 백열전구를 밝혀낸 에디슨, 장애를 딛고 세상에 목소리를 낸 헬렌 켈러.
아이들은 그들의 찬란한 업적을 좇으며 저마다의 꿈을 덧그린다. 그런데 위인전에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정치인들이다.
간혹 링컨이나 간디 같은 인물이 예외적으로 실리지만, 대부분의 정치인은 철저히 배제된다. 이는 편집자의 취향이 아니다. 위인전을 만드는 이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은 ‘사회적 변혁을 이루었고, 인류에 헌신했으며, 성숙한 인품을 갖춘 사람’이기 때문이다.
위인전이 아이들에게 전하려는 것은 권력도, 명예도 아닌 협력과 헌신, 공동체 정신이다. 하지만 오늘의 정치인들은 어떤가. 뉴스 속에서 그들의 이름은 고성과 혐오, 저주와 보복에 더 자주 등장한다.
볼썽사나운 쌍말과 조롱, 빈정, 무지, 무례…. 아이들에게 협력과 배려, 존중, 희생, 정의가 아니라 미움과 거짓, 분열, 협잡을 가르친다. 본받으라 하기엔, 솔직히 무섭기까지 하다.
위인전에 이름을 남긴 이들의 공통점은 ‘창조’와 ‘헌신’이다. 과학자는 인류의 한계를 넘어 시대를 열었고, 예술가는 상처 난 마음을 어루만졌다. 그들의 이야기는 인내와 도전, 그리고 인류 보편의 가치로 빛난다.
물론 인류 역사를 바꾼 정치인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링컨은 노예제를 폐지해 미국 민주주의의 기틀을 세웠고, 간디는 비폭력으로 제국주의에 맞섰다. 만델라는 인종차별을 넘어 화해와 통합의 상징이 되었다. 그들은 권력을 쥐었지만, 권력보다 더 큰 가치를 품었다. 승자와 패자를 가르지 않고 모두가 함께 가는 길을 열었다.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 정치는 어떤가? 비열한 도시에서 벌어지는 동물의 왕국 같지 않은가. 정적의 목덜미를 노리는 포식자와 그 사체를 나누는 스캐빈저(scavenger)들의 정글. 모두를 위한 정책보다 자기들만의 정쟁이, 공익보다 사익이, 협력보다 배타가 앞선다. 이런 정치는 국민에게 감동이 아니라 피로만 남긴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지금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가장 무거운 사법의 칼날 위에 서 있다. 그가 내세웠던 ‘공정과 정의’라는 기치가 오히려 아이러니로 다가온다.
이재명 대통령 또한 권력을 쥠으로써 재판정 출석이 잠시 멈췄지만 불안의 그림자는 짙다. 조롱과 비아냥 거리가 되는 부끄러움도 여전히 꼬리표가 되고 있다. 그의 추진력은 지지자에겐 덕목이지만, 반대자에겐 독선으로 보인다.
둘 다 현존 정치의 주요 배역들이지만, 훗날 위인전에 실릴 수 있을까? 조만간 우리나라 위인전에 ‘정치인’의 이름이 등장하길 기대한다.
그러나 그 이름이 이재명과 윤석열일 가능성에 대해 지금으로선 회의적이다. 나만 그런가?
적어도 권력의 높이보다 인간됨의 깊이를 먼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권력은 잡는 순간부터 흩어진다. 움켜쥐면 쥘수록 더 빠르게 사라진다. 그래서 위인전은 권력을 어떻게 얻었는지가 아니라 권력을 어떻게 썼는가를 묻는다.
우리의 아이들이 배우길 바라는 건 ‘승리’가 아니라 ‘헌신’이다. 가을이다. 아이가 위인전을 읽는다. 언젠가 그 책 속에 우리 정치인의 이름이 실렸으면 좋겠다.
‘정치’를 넘어 ‘인류’를 품었을 때일 것이다.
정상환 한경국립대 객원교수/The Brain & Action Communic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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