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으면 소설이나 수필보다는 역사책을 들 때가 많다. 자기 인생이 소설보다 우여곡절이 많았고 수필은 뭔가 시시해 보이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이야기가 최고다. 역사는 사랑, 욕망, 음모, 배신, 복수의 생생한 현장이다. 허구의 세계보다 실제 일어났던 일은 우리의 죽은 정신 세포를 일깨운다.

역사도 사람이 쓰는 것이라 자기 생각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편견은 있겠지만 그래도 전부 거짓은 아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 우리의 훌륭한 역사책이 있지만 잘 안 보게 된다. 전문가들이나 보는 책이다.

대신 사마천의 사기는 많이 읽힌다. 역사와 소설을 합쳐 놓은 것처럼 재밌기 때문이다. 여러 번 읽게 되니 나에게는 이런 것이 고전이다.

원문이 유려해서 번역문도 읽기 편하다. 2100여 년 전 쓴 책이 지금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다.

읽다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휴대폰을 쓰고 자동차를 타는 지금 사람이나, 봉화를 올리고 말 탔던 그때 사람이나 다 똑같다.

사마천의 사기를 최근에 다시 읽고 내 나름대로 정리한 것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정의나 사필귀정은 좋은 말인데 잘 실현되지 않는다.

사마천은 하늘의 이치라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 헷갈린다고 말했다.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오히려 벌을 받고, 못된 자들이 잘사는 불공정한 세태를 비판한 것이다.

빌 게이츠도 “인생은 원래 불공평한 것”이라고 말했다.

둘째, 역사가가 해야 할 일은 과거를 정확히 서술해 미래를 생각하는 일이다.

사기는 전체적으로는 사마천이 발로 뛰고 눈으로 확인한 기록이다. 한 고조 유방이 건달 시절 다녔던 술집과 주인 이름까지 적었다.

역사는 정확한 과거의 인식을 가지고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앞으로 미래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의 이야기다. 100년 전 역사도 왜곡하는 우리의 현실을 보면 부럽기 짝이 없다.

셋째, 인간의 운명과 권력의 속성에 대해 추상적 얘기보다 현실적인 서술방식을 택했다.

현실 세계는 권력과 도덕이 일치하지 않고, 역사는 일정한 패턴을 따르지만 개인의 행동과 선택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을 인정했다.

작년에 일어났던 황당한 계엄 선포가 그 예다. 역사의 필연성보다는 인간 개인의 선택을 강조한다. 미국의 트럼프 현상도 마찬가지다.

언제부터 “나의 평가는 역사가 할 것이다”라면서 역사와 대화하는 지도자도 등장했다. 역사에 대한 소신 있는 리더십의 표현일 수도 있지만 무책임하고 오만한 태도의 전형이다.

사마천에 대한 비판도 많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치고받고 싸우는 사기의 기록을 무시했다.

인물 선택에도 주관과 임의성이 지나치게 개입돼 실록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이 모든 비난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기록을 넘어 인물들의 행적과 심리 변화를 분석해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을 한 역사책은 사기에 필적할 만한 것이 없다.

사마천의 사기 중 특히 열전(列傳, 황제나 제후가 아닌 다양한 인물들의 전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시대를 잘못 만나 고생하기도 하고, 세 치 혀로 아첨과 모략을 통해 출세하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의 배신으로 모함당해 죽기도 한다.

선과 악, 거짓과 진실이 서로 얽히고 엮인 인간 드라마다. 다채로운 인간들의 성공과 실패담을 통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보여준다.

사마천 스스로 사기를 쓴 목적을 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 친구인 任安에게 답신하는 글)에서 드러냈다.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과거와 현재의 변화를 꿰뚫어, 일가의 문장을 이루고자”(究天人之際, 通古今之變, 成一家之言) 썼다고 했다.

나는 사마천의 말을 이렇게 이해한다.

인간의 노력과 지혜를 믿으나 동시에 예측 불가능한 운명의 힘을 인정한다.

인간사에는 선악의 논리를 넘어선 복잡한 인과관계가 있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몰려들고 이익이 떨어지면 떠난다.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하고 관계를 유지하느냐가 중요하다.

성선설이니 성악설이니 모두 인간의 일면을 보는 데 불과하고 확실한 것은 인간은 누구나 비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열은 악한 것과는 다르다.

일본의 소설가 다케다 타이준(1912~1976)의 명언이 있다.

“나는 인간의 비열함이야말로 가장 사랑해야 할 인류의 본성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역사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비열한 인간 본성이 다양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보여주는 거울과 같다.

이인재 전 파주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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