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초를 다녀왔습니다. 매년 빠짐없이 추석을 앞두고 형제들이 모여서 하는 연례행사이지요. 벌초를 하는 것은 추석 성묘나 시제(時祭)때 마음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해지기 때문입니다. 조상님 잘 모신다는 내면의 위안이 되는 건 덤이지요. 산소는 그 나름의 의미가 있습니다. 산소는 돌아가신 조상님의 안식처이지만 살아있는 사람에게도 마음의 쉼터가 될 수 있는 공간이지요. 오랜 세월 공직자로 살아온 저는 승진을 하거나 자리를 이동했을 때 산소를 찾아 부모님께 인사를 올리곤 했습니다.

사는 게 힘겨울 때도 산소엘 가서 넋두리를 늘어놓곤 했지요. 그러면 답답했던 가슴이 편해지고 돌아가신 부모님이 도와주실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버이는 살아서나 하늘나라에서나 자식들을 보살펴주시는 불멸(不滅)의 존재이지요. 부모님은 많지 않은 땅에 농사를 지으면서 자식들을 뒷바라지하느라 눈물겨운 삶을 사셨습니다. 6남매는 공부를 잘했지요. 다른 집에선 당연히 자랑거리인데 부모님은 그게 걱정거리였습니다. 공부를 잘하니 학교에 안 보낼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지요. 공부 잘하는 자식들 때문에 남보다 훨씬 더 고생을 하신 셈입니다.

우연히 “땅을 팔아서라도 애들을 공부시켜야 되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울컥했지요.

술을 좋아하시던 아버지는 마음대로 내 돈 내고 술 한 잔 제대로 사 드시지 못하셨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인정 많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멋쟁이셨지요. 넉넉지 않은 형편에서도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엔 누구보다도 앞장섰고 의용소방대장으로도 봉사하며 지내셨습니다. 회갑 잔치를 한 다음 해도 저희와 벌초를 함께 했는데 일주일 만에 갑자기 돌아가셨지요. 벌초를 마치고 함께 막걸리를 기울이며 호탕하게 웃으시던 모습이 마지막이 된 것입니다. 예순 둘, 참 아까운 나이였지요. 그래서 벌초할 때면 하늘의 별이 된 아버지가 더욱 그리운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머니도 가난한 집안에 시집와 어렵사리 알뜰살뜰 살림을 꾸려 나가셨지요. 그래도 힘겨운 삶 속에서도 자식들에게 큰소리 한 번 안하신 현명한 분이셨습니다. 그렇지만 가끔 땅거미 내려앉는 우물가에서 어깨를 들먹이며 우시는 뒷모습을 보며 울었던 기억이 생생하지요. 그런 어머니가 안쓰러워 도와드려야겠다는 마음으로 집안일과 농사일을 열심히 도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홀로 되신 어머니는 말년을 외롭게 보내셨지요. 지지리 복도 없는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늘에 계신 부모님이 저를 대견하게 지켜보실 겁니다. 부끄럽지 않도록 죽을힘을 다해 일하겠습니다.”

명예퇴직 후, 운 좋게도 경기관광공사 사장으로 일하게 되었지요. 그때 지사께서 주관하는 간부회의에 참석해 신임인사를 하게 됐습니다. 다른 분들은 “지사님 잘 모시고 열심히 일하겠다”고 했는데 저는 뜬금없이 부모님을 소환(?)한 거지요. 그런데 의외로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의례적인 인사가 아닌 진심이 담긴 인사란 느낌이 전해졌기 때문이겠지요. “인사 말씀이 참 인상 깊고 감동적이었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데 부지사가 두 손을 꼭 잡고 제게 건넨 한마디가 따뜻했고 고마웠습니다.

벌초는 풀을 깎고 잡초만 뽑는 일이 아니지요. 돌아가신 부모님의 힘겨웠던 삶을 생각하며 마음을 곧추세우는 일입니다. 또한 희미하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를 추억하는 시간이기도 하지요. 벌초는 벌초이상의 의미가 있고 산소는 산소이상의 의미가 있는 겁니다. 벌초를 마치고 돌아서는 마음은 산자락을 붙잡고 돌아설 줄 몰랐지요. 그리움이 절절했기 때문일 겁니다. 추석에 부모님을 만나면 이야기꽃 향기가 넘쳐흐르겠지요. 갈수록 부모님 생각이 더 간절해지는 걸보니 저도 나이가 들었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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