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어떻게 태어났어?” “다리 밑에서 주워왔지.” 어릴 적 이 이야기를 듣고, 정말 다리 밑에서 주워온 고아인 줄 알고 서글피 운 기억이 있다. 주위에 생을 달리 하시는 많은 분들을 보며 생명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나라는 생명은 어떻게 생겨서 지금까지 살고 있는 걸까?
프란치스코 교황은 생명 전달의 과정과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제네러티비티(generativity)’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일반적으로 ‘생산성’이라고 번역하지만, 생명 전달과 관련해서는 ‘생육성(生育性)’으로 번역하기를 권장한다. 생명이 탄생하는 것만이 아닌, 탄생한 생명을 돌보고 양육하며 새로운 생명을 낳는 과정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다.
생육성에 따르면, 생명 전달의 과정에는 적어도 ‘열망, 탄생, 양육, 포기’의 네 단계가 존재한다. 생명이 있기 위해 생명을 간절히 바라는 열망이 있어야 하며, 그 열망이 생명의 잉태와 탄생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그것으로 생명이 온전히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긴 시간 동안의 양육이 필요하며, 성인이 된 생명이 떠나 새로운 생명을 낳도록, 가도록 놓아주는 포기가 필요하다.
며칠 전 태어난 지 몇 달 안 되는 손녀의 사진을 보여주며 해맑은 미소를 짓는 한 ‘젊은 할머니’를 뵌 적이 있다. 갓 태어난 아기가 기쁨과 행복을 주는 것은 아이의 순수하고 예쁜 모습 때문이겠지만, 생명이란 신비가 마음을 포근하게 채워주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아기의 웃는 얼굴을 보고 감히 누가 낙태나 안락사와 같은 단어를 떠올리겠는가. 생명은 그토록 소중하며 신비롭다. 우리는 생명 전달의 과정에 속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존재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 소중하며 신비로운 존재다.
생명 전달의 과정과 함께 ‘어른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보게 된다. 나이가 먹으면 저절로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을 낳아 기르는 과정에 참여하며, 그 안에서 고통과 괴로움, 기쁨과 환희, 자기를 죽이고 버리는 과정을 거치며 어른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폭싹 속았수다’는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드라마였다.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괴로울 때는 괴로운 대로, 살아지는 대로 살면서, 그렇게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되고 어른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를 낳아 길러 본 적이 없는 천주교 사제는 가장 철이 없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하지만 사제가 성당에서 하는 역할 역시 부모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제는 신자 공동체와 함께 살며 그들을 돌보고 양육하는 역할을 한다. 거기에도 생명 전달의 네 단계가 모두 자리한다. 세례로 새로운 신자가 태어나고, 미사(말씀과 성사)로 양육하며, 혼인을 통해 부모를 떠나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고해와 병자성사로 상처를 치유하며, 장례미사로 지상 여정을 마감한다. 이 모든 생의 과정을 함께 살면서 사제는 어른이 되고 사제가 되어 간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또한 관대함과 포용력을 배우는 것이다. 싸우는 자식은 부모에게 가장 큰 아픔일 것이다. 그러나 부모는 어느 편을 들지 않고 모두를 사랑스러운 자녀로 받아주고 보듬어 안아주는 포용력을 지닌 존재다. 사제가 되어 성당에 보좌신부로 처음 부임했을 때, 부모님께서 주임 신부님께 인사 오시며 이불을 선물로 준비해 오신 적이 있다. 그때는 몰랐지만, 자식의 허물이 보이더라도 넓은 아량으로 덮어 주십사 청하는 부모님의 따뜻한 마음이 담긴 선물이 아니었을까 헤아려 본다. 우리는 모두 부모님, 어른들의 관대함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인생은 학교다. 참 어른이 되는 학교이며, 참 부모가 되는 법을 배우는 학교다. 부족하고 죄 많은 우리를 받아주고 보듬어 안아주는 하느님(혹은 각자가 종교에서 믿는 신)의 한없는 자비와 관대함을 배우는 학교다. 하느님은 참 어른이시다. 우리가 각자 살아온 삶을, 그리고 서로를 보듬어 안아주기를 바라신다. 그분은 우리가 살아온 굴곡진 삶을 잘 아시고 그 안에 함께 하시며 함께 기뻐하시고 괴로워하시며 우리의 삶을 축복해 주시고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신다. 우리는 그렇게 하느님을 닮은 참 어른이 되어 가는 중이다.
한민택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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