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410년, ‘영원의 도시’ 로마가 서고트족의 왕 알라리크에 의해 함락되었다. 세계의 심장이 멎는 듯한 이 사건은 단순한 제국의 쇠락을 넘어, 로마가 이룩한 세계의 질서와 가치관, 즉 ‘팍스 로마나’(Pax Romana)가 영원할 것이라 믿었던 이들에게는 세상의 종말과도 같은 충격이었다. 역사가 크리스토퍼 도슨(Christopher Dawson)이 지적했듯이 로마의 함락은 “지중해 세계를 통합했던 문명 전체의 붕괴”를 의미했다. 혼란 속에서 비난의 화살은 기독교를 향했다. 로마가 전통 신들을 버렸기에 신들의 분노를 샀다는 이교도들의 원성이 터져 나왔다. 바로 이 절망의 한복판에서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는 펜을 들어 13년에 걸쳐 필생의 대작, ‘신국론’(De Civitate Dei)을 완성한다. 이 책은 단순한 변증을 넘어, 로마적 세계관의 폐허 위에서 인류 역사의 본질을 꿰뚫는 새로운 역사철학을 세운 기념비적 저작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역사를 움직이는 근원적 동력이 눈에 보이는 제국의 흥망성쇠가 아님을 선언한다. 그는 인류의 역사를 두 개의 ‘도성(都城, Civitas)’이 투쟁하며 만들어가는 거대한 드라마로 파악한다. 이 두 도성은 국경이나 민족이 아닌, 인간을 근원적으로 구분하는 두 가지 사랑의 방식에 의해 형성된 영적 공동체이다. 그 하나가 지상의 도성(Civitas Terrena)이다. 이 도성은 ‘자기에 대한 사랑’(amor sui)으로 세워졌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사랑이 “신을 경멸하는 데까지 이르는 교만”이라고 정의한다. 지상의 도성은 바벨론과 로마 제국처럼 현세의 영광과 권력, 물질적 평화를 최고의 가치로 추구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역사의 주인이라 여기지만, 그 본질은 분열과 다툼, 그리고 필연적 멸망을 향해 나아간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도성(Civitas Dei)이다. 반면 이 도성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amor Dei)으로 세워졌다. 이는 “자기를 경멸하는 데까지 이르는 겸손한 헌신”이다. 이 도성의 시민들은 지상에서 순례자처럼 살아가며 영원한 하늘의 평화를 소망한다. 그들에게 로마의 멸망은 지상 도성의 일시성을 보여주는 사건일 뿐, 영원한 신국의 패배를 의미하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키케로(Cicero)가 ‘국가론’에서 정의한 “정의의 합의에 기반한 공동체”로서의 로마 개념을 비판하며, 참된 정의는 오직 신을 올바르게 섬기는 ‘하나님의 도성’에서만 가능하다고 역설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역사철학이 혁명적인 이유는, 역사를 목적론적이고 선형적인 과정으로 파악했다는 점에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역사가 신의 창조에서 시작하여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을 거쳐 최후의 심판이라는 명확한 ‘종말’을 향해 나아간다고 보았다. 로마의 멸망조차 우연이나 운명의 장난이 아닌, 신의 더 큰 섭리 안에서 영원한 가치를 드러내기 위한 과정의 일부라는 것이다. 이는 서구 역사관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헤겔(Hegel)이나 마르크스(Marx)의 역사철학에 이르기까지 그 흔적을 남겼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통찰은 1천600년의 시간을 넘어, 21세기를 사는 우리 영혼에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질문을 들이댄다. 당신의 ‘영원의 도시’는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가 숭배하며 모든 것을 바치는 ‘영원의 도시’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국가라는 굳건한 울타리일까, 민족이라는 뜨거운 혈연일까, 혹은 강력한 이념이나 자본주의가 약속하는 멈추지 않는 무한한 번영일까?
우리는 이러한 현세적 가치들의 영속성(永續性)을 맹신하곤 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단 하나의 작은 균열이라도 보일 때면, 마치 로마의 멸망을 목도한 시민들처럼 극심한 절망과 맹렬한 분노에 사로잡힌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궁극적인 시험대를 내민다. 그것은 우리의 가장 깊은 소속감과 진정한 사랑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를 묻는 존재론적 물음이다. 하여, 그는 지상의 도성을 등지고 도피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국의 시민으로서 지상의 도성 안에서 ‘질서 있는 공존’을 위해 노력하며, “이 땅의 평화를 사용하되, 그것을 영원한 평화와 혼동하지 말라”고 촉구한다. 자기 집단의 이익을 절대화하는 ‘자기에 대한 사랑’이 만연한 시대, 무너진 로마의 잿더미 위에서 영원을 바라보았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지혜는, 우리 시대의 만연한 갈등과 혐오 속에서 진정한 희망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알려주는 여전히 유효한 길잡이가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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