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쌍스’
고 문인수 시인을 기억하는, 아주 작으나 우리로서는 의미 있는 일이 있었다. 대구 동구 시장 입구의 오래된 연립상가 2층에 있는 르네상스 다방을 그를 기억하는 공간으로 정하고 표식을 한 것이다. 그는 만년에 이곳의, 시장통이 내려다보이는 창가를 자신의 ‘관람석’으로 정했다. ‘낡은 호마이카 식탁이 대여섯 개, 비닐 커버를 씌운 철제 의자들, 크고 작은 화분들이 탁자 사이에 예 저기 놓여 있는’ 아주 소박한, 옛 도시 변두리의 다방 풍경을 여전히 갖고 있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그는 혼자 앉아 멍을 때리기도 했다. 더러 누굴 만날 때는 응접하는 곳이 되기도 했다. 시를 봐달라고 하는 이들도 있어서 부정기적인 개인 문학 교실이 되기도 했다. 그는 그러한 생활을 시로 남겼다. 제목이 ‘르네쌍스’다. ‘르네상스’라는 현실 공간을 굳이 ‘르네쌍스’라는 이름으로 고쳐 씀으로써 그의 공간으로 만든 게 아닌가 여겨진다. 우리들 몇몇 그와 가까이 지냈던 이들은 그가 즐겨 앉았던 창가 벽에다 손바닥만 한 작은 동판을 붙였다. 얼굴을 그린 커리커쳐와 함께 “나는 걸핏하면 르네쌍스의 관람석에 갇힌다”라는 그의 시의 한 구절을 새긴 것이었다.
함께 했던 한 시인은 이를 두고 “의미 있는 장소를 발명하고 유지하는 데 자그마한 역할을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참석한 문인들은 각자의 은밀한 문학 공간을 헤아리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장소를 기억하는 형식은 이렇듯 현재를 미래로 잇는 하나의 문화 형식이 되기도 한다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구절리
가을빛이 뚜렷해진다. 매일 산책하는 신천 상류 양안의 빛깔도 바뀌고 있다. 강변의, 수달이 깃들라고 조성한 자그마한 못 주변 언덕을 억새 못지않은 정취를 자아내는 수크령이 덮은 가운데, 그와 어울려서 구절초 꽃들이 피어 하늘거린다. 몇 년 전부터 누가(이 구역의 하천 관리원이 했을까?) 구절초밭을 가꾸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차츰 번져서 이제는 희디흰 꽃들이 둔덕을 넓게 덮는 장관을 보인다. 가을다운 특별한 공간이어서 자주 그곳에 머물러서 서성댄다. 그리하여 그곳을 나만의 공간으로 만들자는 욕심으로 구절리라 명명했다. 강원도 정선 여랑면의 한 동네 이름이 구절리인데, 그 뜻과는 달리 구절초가 꽃 피는 동네라는 의미로 붙인 것이다.
기실 신천 상류에는 내가 산책 중 틈틈이 붙인 동네 이름들이 더 있다. 바위들이 많은 곳이 석탄리(石灘里, 돌여울 마을)이고, 용두골 어귀의 징검다리 아래쪽은 갈대가 무성하여 갈대리라 부른다. 그 위쪽 제법 깊은 소가 있는 곳은 이따금 수달이 출몰해서 수달리라 이름 지었다. 이런 이름짓기는 자주 산책하는 공간을 특화하여 ‘나의 세계’로 만들려는 극히 개인적인 욕심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이름을 되뇌다 보니, 어느덧 특별한 장소로 여겨지면서 나를 더 오래 그곳에 붙들어 매는 듯하다.
우리 일상의 삶을 둘러싼 풍경과 공간들은 별 볼 일 없고, 하잖고 밋밋한 듯하지만, ‘내’가 속한 공간이라는 조금은 특별한 시선으로 보면 의외로 독특하면서도 아름답고 불가사의한 장소임을 발견하게 되어 새삼 나만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한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공간에 자기 영혼을 표현하는 방법’이라 한다. 즉 살고 있는 공간에 자신의 ‘영혼성’을 부여할 때 자신의 정체성이 새삼 인식되면서 심리적으로 큰 위안을 느끼는 것이다.
신천 상류의 산책길은 만년에 내가 가장 위로를 받는 공간이다. 그곳 풍경과 사물들이 늘 새삼스럽게 여겨지고, 생광스럽기도 해서 ‘나의 숨겨진 세계’로 여기고 나만의 특별한 이름 짓기도 하는 것이다.
#공간의 꿈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수시로 각자의 특색있는 공간을 꿈꾸기 마련이다. 서재를 새로 꾸민다든가, 거실을 새롭게 바꾸는 것도 그중의 하나다. 비좁은 공간이나마 작은 정원을 독특하게 만들려는 꿈도 많이 갖는 듯하다. 그것은 자신만의 공간, 곧 ‘자신의 세계’를 가지려는 소박하지만 절실한 꿈인 셈이다.
장소에 대한 꿈은 스스로 그 장소의 특성을 살려서 이름 지음으로써 이루어지기도 한다. 과거 선비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여 전국 곳곳에 분포하게 한 ‘구곡(九曲) 문화’도 그런 꿈을 실현하려는 한 형태라 할 만하다. 자신이 머무는 서재와 정자에 이름을 붙이고 현판을 걺으로써 자신이 있는 공간을 특수화하기도 했다. 비록 누추하고 보잘것없는 삶의 공간이지만, 이를 의미 있게 디자인하는 상징적인 형식인 셈이다. 시인 김춘수는 시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했다. 명명함으로써 ‘내’게 존재가 새롭게 의미 지어지고 떠오른다고 여긴 것이다.
‘내’가 깃든 공간은 무엇보다 나의 서사가 서식하는 공간이다. 그 이야기를 해독하는 방식으로 ‘공간의 꿈’이 실현될 수도 있다. 가령 서재를 새로 꾸미면 책들과 책장 위에 놓이는 사물들이 새삼스럽게 해석되어 그 존재성이 다시 새로운 의미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 존재성의 표정은 결국 서재 주인의 모습이며,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그를 응원하고 위안을 주는 눈길을 갖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공간의 꿈은 자신이 디자인하는 삶의 진정한 표현으로 드러난다.
문인이나 예술가가 아니라도 스스로의 공간에 새겨진 메시지들을 나름으로 해독할 수 있다. 그 해독의 민감함과 의미 지음으로 인해 그 공간이 특별해지기도 한다.
요즘 나는 서재에서 매일 몇 개의 물건들과 책들을 솎아내어 내다 버린다. 내가 사는 공간을 새로 디자인하기 위해 기존의 관념들을 몰아내고 비우기부터 하는 것이다. 노년의 ‘전망이 불안한’ 삶이긴 하지만, 현재의 삶이 그런 디자인으로 조금이나마 새로움이 유지되기를 여전히 꿈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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