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여름, 국민학교 정문 앞 문방구에서는 나를 비롯 동네 아이들이 모여 작은 흑백 TV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그날 처음 방영된 ‘로보트 태권브이’는 단순한 만화가 아니었다. 하늘을 날아 악을 물리치는 강철의 거인은 현실에 없던 존재였지만 우리 마음속에는 너무도 친숙했다. 그는 싸움을 잘하는 기계 그 이상이었다. 기계이면서도 분명 마음을 지닌 존재처럼 느껴졌다.
태권브이는 당시 모두의 꿈이었다. 과학이 인간을 지켜주는 따뜻한 힘이 될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 우리 세대가 품었던 첫 ‘기술에 대한 희망’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반세기가 흘렀다. 상상 속 영웅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 인공지능은 화면 속을 넘어 현실 공간으로 걸어 나왔다. 이제 AI는 사람의 말을 듣고, 눈빛을 읽고, 스스로 판단해 움직인다. 언어 중심의 지능에서 신체를 지닌 지능 즉 피지컬 AI(Physical AI) 시대로의 전환이 현실이 된 것이다.
세계의 기술 강국들은 이미 이 변화의 중심에서 경쟁하고 있다. 테슬라는 휴머노이드 로봇 ‘옵티머스(Optimus)’를 생산 현장에 투입해 인간의 노동을 보조하고, 오픈AI는 ‘Figure AI’와 손잡고 대화하고 사고하는 인간형 로봇을 연구 중이다. 일본의 혼다와 소니는 감정을 인식하고 반응하는 로봇 개발로, 차가운 기계의 세계에 감성의 온도를 불어넣고 있다. 이제 기술의 초점은 ‘얼마나 능숙하게 계산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자연스럽게 인간의 세계 속으로 들어올 수 있느냐’로 옮겨가고 있다. 속도보다 ‘관계’, 성능보다 ‘공존’이 중요한 시대다.
지난 10월 1일, 국회에서 열린 한국피지컬AI협회 컨퍼런스는 그 전환의 방향을 잘 보여주었다. 정부와 국회, 산업계, 학계가 한자리에 모여 논의한 주제는 단순히 산업의 패러다임이 아니었다. “AI의 진보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의미를 묻는 철학의 문제다.” 그것이 참석자들이 공유한 결론이었다. 이제 AI 발전의 핵심 질문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왜 그것을 해야 하는가?”로 바뀌고 있다.
생각해 보면, 인공지능은 정답을 찾아내는 데는 능숙하지만, 의미를 찾는 일에는 서툴다. 자율주행차가 빠르고 정확하게 위험을 인식하고 브레이크를 밟을 때조차, 그 계산에는 ‘두려움’이 없다. AI에게 멈춤은 연산의 결과지만, 인간에게 멈춤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다. 이 차이가 바로 기술과 인간의 간극이자, 우리가 끝까지 지켜야 할 품격이다. AI가 운전하고, 로봇이 일하고, 알고리즘이 판단하는 세상. 우리는 그 속에서 편리함을 누리지만 동시에 묘한 불안을 느낀다. 기계가 능숙해질수록 인간의 역할이 줄어드는 듯하고, 인간의 감정은 데이터로 환원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불안 속에서 우리는 다시 인간다움의 본질을 찾게 된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하는 것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다. 기술이 우리의 마음을 대체할까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인간을 닮은 기술이 아니라 인간을 이해하는 기술이다.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는 돌봄 로봇, 물류창고를 오가는 작업 로봇은 ‘효율의 산물’이 아니라 ‘공존의 실험’이어야 한다. 기술이 사람의 자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한계를 극복하게 하는 힘이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한국의 기술 실험은 흥미롭고도 귀중하다. 스타트업과 대학 연구소, 수많은 테크 기업들이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지금 이 시간에도 분투하고 있다. 불가능해 보이는 장벽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인간과 함께 일하는 기계’를 꿈꾸는 이들의 도전은 바로 우리 기술의 품격이자 미래다.
문득, 그 오래된 목소리가 마음속에서 다시 울린다. 어린 날의 TV 화면 속, 푸른 하늘을 가르며 외치던 태권브이의 함성, 그것은 단순한 주제가가 아니었다. 인간의 정의를 향한 한 시대의 염원이었고, 기술에 담긴 도덕적 상상력이었다.
이제 우리는 그 목소리를 다시 들어야 한다. “하늘을 달려라, 정의의 이름으로 악을 물리쳐라.” 그 외침은 지금 시대의 기술에도 필요한 도덕적 나침반이다.
언젠가 기술이 인간의 따뜻함과 연민을 품고 하늘을 날 수 있다면 그때 태권브이는 더 이상 만화 속 로봇이 아닐 것이다. 그는 매일 우리 곁에서 조용히 일하는 인간다운 기술의 또 다른 이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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