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워렌 맥컬록과 월터 피츠가 전자회로로 인간의 신경망을 모사한 논문을 발표한 이후 어느덧 80년을 훌쩍 넘어섰다. 철학적 상상력과 수학적 논리가 만난 그 실험적 시도는 이후 오랜 침묵의 시간을 지나며 점차 진화했고, 마침내 오늘날의 초거대 AI 혁명을 가능하게 한 출발점이 되었다.

2025년을 두 달 앞둔 지금 AI를 떠올리면 ‘AI 모델·GPU·HBM’ 같은 기술 용어가 먼저 떠오른다. 동시에 OpenAI, xAI, DeepMind, DeepSeek, NVIDIA, SK하이닉스, 삼성전자 등과 같은 기업들이 서로 긴밀하게 얽힌 거대한 기술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들은 모델 개발, 연산 인프라, 메모리·반도체, 데이터 자원 등을 유기적으로 결합하며 하나의 거대한 ‘지능 체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단일 기업의 역량이 아니라, 각자의 기술이 맞물려 새로운 지능 질서를 형성하는 모습이 지금의 AI 시대를 규정한다.

이 거대한 변화는 단순한 기술 경쟁을 넘어 민주주의의 구조를 재편하는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바로 여기서 주목해야 할 개념이 ‘전환적 민주주의’다.

전환적 민주주의는 인간과 AI가 상호 보완적으로 협력해 의사결정·참여·합의 과정을 다시 설계하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체계이자 체제를 말한다. 기존 민주주의가 인간의 인지적 한계 위에서 운영되었다면, 전환적 민주주의는 인간과 AI의 결합된 지능을 기반으로 정책과 사회 선택을 보다 합리적으로 구성하려는 시도다. 이미 일상에서 우리는 그 전환을 경험하고 있다. 추천 알고리즘은 개인의 선택을 조용히 유도하고, 금융·의료·행정에서는 지능화된 판단 시스템이 기존의 절차를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인간의 자율성을 위축시킬 가능성을 갖는 동시에, 인간의 편향과 오류를 줄이는 새로운 공공성의 기회를 제공한다.

민주주의의 질을 어떻게 높일 것인지, 그 답은 기술이 아니라 제도적 설계에 달려 있다. 가정에서도 변화는 분명하다. 물리적 형태의 AI, 즉 Physical AI 로봇이 일상 공간에 등장하며 단순한 노동 대체를 넘어 관계와 의사결정 과정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감정 인식과 자연스러운 대화, 실시간 학습 능력을 갖춘 로봇은 더 이상 주어진 명령을 수행하는 도구가 아니라, ‘함께 사는 존재’로 자리 잡고 있다. 민주주의가 공공영역을 넘어 가정과 개인의 선택 방식까지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변화의 속도만큼 불확실성도 커지고 있다. 미국의 관세정책과 AI 반도체 공급망 충격은 기술 패권 경쟁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2026년 이후 각국은 본격적인 AI 경쟁에 돌입할 것이며, AI 역량은 국가의 경제력을 넘어 정치 체계와 민주주의의 지속가능성까지 좌우할 결정적 요소가 될 것이다.

결국 질문은 하나다. AI는 민주주의를 확장할 것인가, 축소할 것인가. AI가 투명성과 책임성을 갖춘 방향으로 설계되고, 시민 참여를 강화하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다면 전환적 민주주의는 보다 공정하고 효율적인 체제로 나아갈 수 있다. 반대로 지능 자원이 소수에게 집중된다면 민주주의는 오히려 더 취약해질 것이다. AI는 이미 미래의 가능성이 아니라 현재의 조건이다.

80여 년 전 작은 논문에서 출발한 지능의 역사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장을 열고 있다. 기술의 속도에 주저하기보다, 그 속도를 감당할 정치적 상상력과 사회적 규범을 준비하는 일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과제다. AI가 이끄는 전환적 민주주의의 미래는 결국 우리가 어떤 원칙으로 이 시대를 설계하는지에 달려 있다.

홍충선 경희대학교 인공지능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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