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사는 곳에는 늘 갈등과 다툼이 함께 존재한다. 성경을 통해 보더라도 태초에 사람이 존재하기 시작하면서 갈등과 다툼은 함께 시작되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현실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평화를 찾지만 그 꿈은 요원하기만 하다. 지금 일어나는 세계 각지의 전쟁과 갈등을 지켜보며 제3차 세계대전의 전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얼마 전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 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이 ‘피스 메이커’를 한다면 나는 ‘페이스 메이커’를 하겠다”라고 치켜세웠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평화의 중재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제로 살면서 해야 하는 중요한 일들 중 하나는 사람들을 화해시키는 것이다. "성당에도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가?" 하고 물을지 모르겠지만, 사람 사는 곳이면 늘 갈등과 다툼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필자는 보좌신부로 딱 1년을 본당(일반 성당)에서 생활했는데, 많은 시간을 신자들 화해시키는 데 할애했다.
본당만이 아니라 학교나 교구 등, 사람 사는 곳이면 갈등과 분열은 늘 존재한다. 싸움을 말리면서 부모 입장에서 불목하여 다투고 싸우는 자녀들을 보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헤아려보게 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람들 사이의 화해가 정말 쉽지 않음을 깨닫는다. 어렸을 때는 싸움을 말리는 일에 진심이었으나, 지금은 그냥 싸우게 내버려두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서로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이러한 인간 삶의 현실을 예수님도 잘 아셨으리라. 그런데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는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평화가 아닌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는 이 말씀을 대체 어떤 뜻으로 이해해야 할까? 그런데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분열과 갈등의 문제를 너무 이상주의적이 아닌 현실적으로 접근하라는 뜻이 담겨 있음을 헤아려보게 된다.
사람들은 아무런 갈등도 분열도 없는 세상을 꿈꾸지만, 사실 그것은 우리의 순진한 꿈이다. 싸움이 끝났다고 생각되는 순간 더 큰 싸움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 우리를 괴롭힌다. 그렇지만 싸움과 갈등이 우리의 종착역은 아니기에, 평화를 계속해서 꿈꿔야 하며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도 계속 존재해야 한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인간이 서로 다르기에 갈등과 분열이 없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하며, 이를 위해 분열을 감추거나 부정하기보다 오히려 우리 안의 분열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깔려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분열과 다툼이 없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살다보면 실제로 존재하는 다름과 차이와 그로부터 연유하는 불화를 견디기 힘들어하고 결국 실망하거나 자포자기하고 말 것이다. 진정한 평화와 화합은 서로의 다름과 그에 따른 분열과 갈등을 거친 후에야 다다를 수 있는 목적지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름을 인정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예수님께서 다름을 인정하셨기에 다양한 기질, 출신, 정치 성향의 제자를 뽑으실 수 있었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일치를 추구하는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분열을 감추기보다 직시하고 인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얼마나 다른지 알기 위해, 그리고 ‘일치’라는 것이 한 번에 주어지는 것이 아닌 우리가 함께 이루어야 할 과제임을 깨닫기 위해서 말이다. 지금 우리는 바로 그러한 일치와 평화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갈등과 분열이 있더라도 실망하지 말자. 갈등과 분열을 넘어 평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서로를 배려하며 성장하는 과정 없이 진정한 평화란 없다.
지금 시대는 나와 다른 사람의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임을 통해 더 큰 일치를 우리 안에 실현하는 문화가 요청되는 시대다. 나와 다른 얼굴, 성향, 말투, 생각, 언어, 문화, 국가 등을 가진 사람이 더 큰 나, 더 큰 우리를 위한 선물임을 알아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지금 필자가 머무는 신학교 기숙사의 외국인 유학생들(중국, 방글라데시)은 더없이 소중한 선물이다.
한민택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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