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시흥의 한 자동차부품 업체에서는 20년 동안 안정되게 납품하던 글로벌 기업으로 부터 RE100에 관한 추진계획을 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자동차 부품회사로서는 별 관심도 없는 내용이라 답변을 무시했다가 거래 중단을 통보받았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공단의 다른 기업들은 발칵 뒤집혔고, 서둘러 RE100관련 포럼이 개최되는 등 부산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아마도 수출기업들부터 시작해서 이러한 청천벽력 같은 일은 전 산업으로 확대될 것이다.
유럽은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2023년부터 시범 운영하고 2026년에 본격 시행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한다. 탄소국경조정제도는 환경규제가 약한 EU 역외국에서 생산된 제품이 EU역내로 수입될 때 탄소함유량에 따라 탄소세금을 부과하겠다는 것인데 자신들의 탄소배출량 보다 많은 경우 이를 세금으로 회수하겠다는 제도다. 아마도 탄소중립을 위해 이와 같은 제도들이 전 세계적으로 속속 만들어질 것이 예상된다.
안타까운 것은 이마저도 자국이기주의 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점이다.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 기업들로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이런 규제에 적극 대응하지 못하면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좀 신중하게 살펴보면, 과연 이러한 규제가 실제로 얼마 남지 않은 1.5도 상승을 막을 수 있을지 회의가 든다는 점이다.
UN이나 EU 등 여러 곳에서 기후위기에 대한 규제를 강화한다고는 하지만 10년도 안 남은 데드라인을 생각하면 너무 느슨한 대응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이미 전문가들은 현재 국제 사회가 계획한 NDC(국가별 기여목표)로는 1.5도 저지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국제사회는 우주 전쟁이라도 치르듯 전 방위로 문제해결에 나서야 할 텐데 여전히 규제 일변도의 정책으로 사사로운 주도권 쟁탈전이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마치 댐이 곧 붕괴되어 재앙이 발생한다고 하는데 옆에서 댐에 사용할 벽돌을 찍고 있는 느낌이다. 진짜 댐이 붕괴될 상황이라면 이보다는 더 급하게 강력한 조치들이 취해져야 할 텐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결국은 복잡한 이해관계로 인해 억울하게 피해를 당하는 기업이 발생한다. 우리 기업들도 어쩌면 이 부류에 속한다. 유럽의 탄소국경조정제도를 따라가려면 탄소배출량을 산출하고 평가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1년 이상 그리고 수 천만 원 이상의 예산이 필요하다. 10년도 안 남은 상황에서 탄소배출량을 평가하는 데만 1년 이상이 필요하다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는가. 하지만 당장의 수출을 위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이런 시간과 돈을 들여야 한다면 이것이 과연 지구를 구하는 일인지 되묻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EU의 경제적 이익을 고려한 것은 아닐지.
이런 상황에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기후위기는 원인이 어떠하든 간에 우리 앞에 닥친 현실이고 이를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 후대는 디스토피아에 살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지난해 6월 세계보건기구(WHO)가 기후우울증의 심각성을 경고했다. 특히 청년층의 상당수가 ‘기후우울증’을 겪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다 강력한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국가우선주의를 뛰어넘는 지구적 질서를 정립하는 일이다. 인간의 탐욕이 확대되어 서로 간의 갈등이 유발될 즈음에 사회적 질서인 공동체가 발달하며 이를 최적화 했다. 그런데 이제는 공동체의 욕구가 커지면서 서로 다른 공동체 간의 충돌과 갈등이 확산되고 있지만 이를 조정할 지구적 절서가 존재하지 않기에 갈등만 증폭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애국과 또 다른 애국이 충돌했을 때 이를 중재할 질서가 바로 지구적 질서이며 지구적 질서는 지구적 선(Global Good)를 지향하기 위한 질서여야 한다. 우리는 윤리적이고 지속가능한 지구적 선을 추구하는 것을 ESGG (Ethical Sustainable Global Good)라 정의하고 보다 체계적인 방법으로 국제기구는 물론이고 국가나 조직 그리고 개인들까지도 지구적 선을 지향하면서 보다 구체적인 계획으로 이를 실천할 때 기후위기, 양극화 등 국가의 이해관계를 뛰어넘은 문제 해결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야 국가를 뛰어넘는 실질적인 지구적 정책들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지구적 질서 하에서 기후위기를 극복하는 방안을 만들어 세계 표준화하는데 우리도 앞장 서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할 일이다. 그래야 우리 기업들도 불필요한 기득권 싸움에 희생양이 되기보다는 보다 적극적으로 지구적 선을 이루는데 일조하는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ESGG라는 이제 막 개념 정립에 들어간 새로운 개념이지만 이 생각을 바탕으로 새로운 표준에 도전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하며 전 세계인들이 오로지 지구적 선에 입각한 정책을 펼치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기대해 본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전하진 SDX재단 이사장, 객원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