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는 규방공예 공방에는 넓은 정원이 있다. 한가운데 자리한 연못에는 요즘 우산 같은 연잎이 가득 덮여 마치 정원에 이어진 땅 같다. 그 광경에서 개화를 준비하는 고요한 분주함이 느껴져 성급한 마음은 벌써 활짝 핀 연꽃을 기대한다. 해마다 이 연못엔 분홍과 흰 연꽃이 청초한 자태로 훌쩍 솟아 피어 한동안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 미술 시간이었다. 미술 선생님께서 통썰기 한 연근을 가져오셨다. 그리고 커다란 팔레트에 다양한 색깔의 물감을 풀어놓았다. 분단의 조별로 앞에 나가 선생님께 연근 조각을 받은 후 물감을 발라 준비해 간 사각형의 흰 천에다 연근 문양을 찍었다. 한번 사용한 연근은 물감 옆의 판에 놓아두었기 때문에 본인이 원하는 색깔과 개수를 마음껏 사용하여 구성할 수 있었다.

나는 한구석에다 초록색만으로 연근의 크기를 달리한 여러 개의 문양을 찍은 후 제출했다. 두 시간 연속으로 진행되던 미술 시간이 끝날 무렵, 칠판 위의 잘 된 몇개의 작품들 사이에 내 것도 걸렸다. 특별히 초록색을 좋아했던 건 아니었는데 흰 천에 진하게 남은 크고 작은 온통 초록만의 싱그러움이 유독 눈을 부시게 했다.

그날 나는 연근을 처음 보았다. 신기한 단면을 가진 연근이 식품이라는 것과 연꽃의 뿌리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더 긴 세월이 지나서였다.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는 연근을 먹을 수 없었다. 수업 도구로 각인된 연근의 첫 이미지가 너무 생생하여 식품이라는 예사로운 용도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그건 야누스 표정이 손쉬운 사람을 결코 좋아할 수 없는 나의 융통성 없는 성향 탓이기도 한 것 같았다.

이제는 영양이 풍부한 연근을 맛있게 먹는다. 다만 조리를 위해 연근을 썰 때마다 단면의 구멍 개수를 헤아려보곤 한다. 가운데까지 세어 10개가 되면 비로소 안심하게 되는 마음은 무엇일까. 어쩌면 내 무의식 속에 연근은 식품이기 이전에 수업 도구였다는 사실을 지금껏 고집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연꽃을 마주할 때마다 왁자지껄한 속에서 연근 문양을 찍던 아련한 그 날이 불쑥 나타나 멈춘 화면이 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경훈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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