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린토인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자신의 약점을 자랑하는 바오로 사도의 모습은 힘과 능력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놀라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2코린 12,9)

사도는 자신의 장점보다는 약점을 자랑하겠다고 하며, 그리스도를 위해서 약함과 모욕, 재난과 박해도 달게 받겠다고 한다. 자신이 약해졌을 때 오히려 강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자신의 약점을 자랑하고 약함과 박해를 달게 받겠다는 말이 일견 어리석게 보이지만, 오늘의 사회가 겪는 다양한 갈등과 다툼, 분열을 이겨낼 수 있는 지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만약 모든 사람이 자신만이 옳고 잘났다고 주장한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대화와 협력, 화해와 평화는 불가능할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 특히 정치권이 그런 것 같아 씁쓸함이 밀려온다. 만약 모든 사람이 자신의 약점과 약함을 인정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훨씬 인간답고 우애 넘치는 사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너무 이상적이고 순진한 생각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지만, 실은 우리 사회를 지탱시켜 온 것이 바로 약점과 약함에 대한 인정일 것이다.

그런데 오늘, 약함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신학계에서 시선을 끌고 있다. 로마 교황청 문화평의회(현 문화교육부)에서 간행한 ‘필요한 휴머니즘을 향하여’(수원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23, 48-55 참조)에서는 ‘나약함’(vulnerability)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이에 따르면 나약함은 불완전함이나 상처를 입었음이 아닌, 상처를 입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말장난 같지만 매우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상처 입을 수 있음(vulnerable)은 상대에게 열려 있고 관심을 기울이며 심지어 상처 입을 위험까지도 감수하는 자세다. 루카 복음서에 등장하는 착한 사마리아인(루카 10,29-37 참조)처럼,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따라서 나약함은 불안정함이나 무력함보다는 민감함이나 포용력에 더 가깝다. 이 문서에서는 나약함이 인간을 서로 알아보게 하고 윤리적 삶을 가능케 하는 바탕이라고 보며 인공지능 시대에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가치로 제시하고 있다.

만약 이 나약함이 없다면, 윤리적 삶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타인이 처한 처지를 보고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약함에 대한 새로운 관점은, 무엇보다 우리의 모든 어머니를 떠올리게 한다. 어머니는 자녀가 어디가 아픈지, 어떤 걱정이 있는지 잘 헤아리셨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말처럼, 어머니께서는 모든 자녀의 마음을 헤아리셨고, 늘 자녀의 편에 서셨다. 나약함은 모든 어머니의 모습이며 마음이고, 바로 그 나약함 안에서 어머니는 강하셨다. 자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아파하며, 상처를 어루만져 주시고, 키워주시고 먹여주셨고, 그래서 우리가 살 수 있게 하셨다. 그러니 어머니의 나약함을 진정한 강함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아버지도 그런 존재시다. 겉으로는 근엄하고 권위적인 모습이지만, 실은 어머니 못지않은 나약함으로 가정을 돌보시고 무언의 침묵으로 보살피신 분이시다.

앞의 문서에서는 이 나약함을 신에게까지 적용시킨다. 보통 신을 전지전능한 존재로 생각하기에 나약함은 신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가 전하는 하느님은 바로 착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분, 상처 입은 아담을 위해 몸소 인간을 찾아오시어 인간의 상처를 싸매주시고 인간을 살리기 위해 당신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분이시다.

하느님을 ‘나약하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은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상처 입고 고통 받는 이웃을 돌보는 사랑을 통해 나약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증인이어야 할 것이다. 정치인들에게 그와 같은 모습을 요구할 수 없겠지만, 국민으로부터 받은 책무가 상처 입고 고통 받는 국민의 처지를 외면하지 않고 다가가 국민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공감하며 그들 편에서 대변인이 되어 억울함과 고통을 덜어주고 보다 정의로운 사회가 되도록 투신하는 것임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한민택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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