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먼과 가펑클의 ‘엘 콘도르 파사’는 팬플루트의 음향으로 고즈넉하게 감성을 자극한다. 원곡은 오페레타 ‘콘도르칸키’(1913)에 사용된 주제곡이다. 작곡가 D. 로블레스가 독립운동가 J. 콘도르칸키를 추모하기 위해 쓴 곡으로, 스페인 사르주엘라 장르에 속한다. 원곡의 선율에 가사가 붙고 3백여 개의 다양한 번안곡과 바리에이션이 생겼다. 그중 하나가 이 듀오의 음악으로 널리 알려진 ‘If I Could’ 버전이다. 그들은 원곡의 슬픈 서사 대신 서정적인 가사로 노래했다. "난 달팽이가 되기보다 참새가 되겠어. 그래, 할 수만 있다면. / 난 못이 되기보다 망치가 되겠어. 그래, 할 수만 있다면. / 차라리 멀리 항해를 떠나겠어. 여기 머물다 떠난 백조처럼. / 인간은 땅에 머물다가 세상에 들려주지. 가장 슬픈 소리를."

잉카 케추아어로 된 변주본이 원곡의 의미에 가장 잘 맞는다. "오 위대한 안데스의 콘도르여. 날 고향 안데스로 데려가 주오. / 돌아가서 내 사랑하는 잉카 형제들과 사는 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라오. / 콘도르여. 쿠스코 광장에서 날 기다려 주오. / 마추픽추와 와이나픽추에서 우리가 한가로이 거닐 수 있게 해주오." 페루 정부는 이 곡이 국가(國歌)나 다름없다고 인정하여 2004년 국가문화유산으로 선포했다. 저항 의식을 가진 이 민중가요는 잉카인들이 겪었던 아픔과 정체성을 담고 있다.

콘도르는 페루 신화와 민속에서 하늘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잉카어로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라는 뜻으로, 동양의 ‘용’과 같은 존재다. 페루 사람들은 위대한 영웅이 죽으면 콘도르가 된다고 믿었다. 불가항력의 벽을 넘으려는 염원이 담겨 있는 듯하다. ‘El Condor Pasa’를 ‘철새는 날아가고’라고 번역하면 그 의미가 충분하게 담보되지 않는다. 역자가 영적인 상징성을 놓친 것은 아닐까. 철새의 사전적 의미는 ‘철을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사는 새’이지만, 언어적 이미지는 줏대 없는 정치인의 부정적인 속성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잉카제국은 침입자의 탐욕에 허망하게 무너졌다. 황제 아타우알파가 죽임을 당하고 나라는 스페인에 종속되었다. 1780년 반군 지도자 콘도르칸키는 페루 농민들을 이끌고 봉기했으나 실패했다. 잔혹하게 처형된 그는 민중의 가슴 속에 각인되어 해방의 상징이 되었다. 그가 다시 콘도르처럼 날아올라 민중을 구원해 주기를 바라는 애절함이 깃든 음악이다. 우리 민요 ‘파랑새’와 성격이 비슷하다. 잉카가 무너지는 과정은 야만적이었다. 침략자들이 지니고 온 세균으로 나라가 초토화되었다. 문명을 부수고 민중을 살육해서 얻은 것은 고작 황금과 권력이었다. 지배자들에게 민중의 삶은 늘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천수만 모래톱 조성 공사 현장에서 포란(抱卵)하고 있는 쇠제비갈매기 둥지 20여 개를 발견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하천과 해안 사구에서 번식하는 이 철새는 노출된 둥지를 짓는 습성으로 인해 포식자의 공격에 취약하다고 한다. 국가가 관리하는 멸종 위기종 2급에 해당하는 조류이다 보니, 서산시와 한국농어촌공사가 공사 일정을 조정하여 보호조치에 들어갔다. 미국에서도 큰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고 공사가 중단된 적이 있었다. 2017년 샌프란시스코만의 대형 교각 공사장 주변 나무 위 둥지 안에 한 개의 벌새 알이 들어있었다. 알이 부화되어 이소(離巢)할 때까지 기다려 준 것은 마치 한 편의 동화 같다. 천연기념물과 멸종 위기종은 엄격한 법의 보호를 받는다. 천연기념물 보호법 적용 사실의 여부를 가름하기보다, 생명 존중을 공사 일정에 포함했다는 것이 깊은 울림을 준다.

조류를 보호하는 태도가 이럴진대, 하물며 사람에 대한 일을 이보다 소홀하게 할 수는 없다. 철새를 보호하려는 것은 단지 우리와 함께 사는 그들의 존재 자체가 귀하기 때문이다. 사회의 약자들에 관한 생각이 깊어져야 하는 대목이다. 극심한 빈부격차 해결의 책임은 결국 국가의 몫이다. 문제가 분배구조의 불균형에서 오기 때문이다. 호주는 국민의 80%가 중산층에 포함되게 구조화되어 있다. 그들에게 가능한 일을 우리라고 못 할 것이 없지 않은가. 철새 서식지 보호 조치를 보면서 저소득 계층, 장애인, 비정규 노동자, 성 소수자와 같은 사회적 소수자들을 다시 상기한다. 배려받아야 할 인간의 존엄이 벌새나 쇠제비갈매기의 번식보다 못한 것일까.

주용수 한경국립대학교 창의예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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