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적인 사고를 본질로 규정하는 호모 사피엔스는 사회성을 통해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다. 사회성은 개인의 본능을 통제하고 타인과 협력하는 능력이며, 이는 계약의 준수에 기반을 둔다. 그러나 계약이 파기되면 개인의 행동에 비이성 본능이 작동할 수 있다. 이는 반사회적이지만 자기 보호를 위한 원초적인 수단이 되기도 한다. 사회 규범이 무너질 때 사회 엔트로피가 증가하나, 이성은 이러한 혼란을 제어하며 무질서를 바로잡아주기도 한다. 권력과 인간 행동의 상호작용을 탐구하는 실험이 있었다.
1971년, 스탠퍼드 대학의 P. 짐바르도 교수는 가상의 스탠퍼드 감옥 실험을 진행했다. 자원한 대학생들에게 무작위로 교도관과 죄수 역할을 부여했다. 이들은 평소 사회 규범을 잘 따르던 학생들이었다. 실험은 실제 교도소처럼 꾸민 공간에서 2주 동안 진행될 예정이었다. 역할극이 시작되자마자 참가자들의 감정과 행동은 예상했던 경계를 넘었고, 두 집단 사이의 불신이 커지면서 폭력의 조짐이 나타났다. 교도관 역할 참가자들은 지배 욕구 본능을 드러냈으며, 죄수 역할 참가자들은 생존을 위해 예상치 못한 방어 기제를 사용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든 참가자는 극도로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동요했다.
교도관들은 죄수들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았으며, 권력에 과몰입한 나머지 폭력과 비도덕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실험은 현실과의 경계를 잃고 급격히 진행되었고, 단 하루 만에 이성의 자율 통제 기능이 모두 사라졌다. 극단의 환경은 개인의 성향과 의지를 무력화시켰고, 평소 그들이 가졌던 가치관과 도덕성은 의미를 잃었다. 이 실험은 가상현실에서도 인간 존엄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고, 사회 상황이 인간 행동과 윤리 판단에 미치는 막대한 영향을 증명했다.
두 진영의 충돌이 유혈 사태를 일으키자 결국 감옥 실험은 6일 만에 중단되었다. 심각한 중상자를 낸 실험 결과는 많은 이에게 충격을 주었다. O.히르비겔 감독은 이 실험을 바탕으로 영화 ‘Experiment’(2001)를 제작했다. 사회 구조와 제도의 문제점이 인간 본성과 권력의 상호작용을 통해 영화에서 다루어졌다. 감독은 권력이 인간 행동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권력을 가진 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이는 인간이 폭력성을 자신의 이성으로 통제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사회의 조직 안에서 인간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정의한다. 권력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으면 본연의 자신과 역할로서의 자신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이는 직위를 신분처럼 여기는 것과 같다. 이 실험은 누구나 상황에 따라 자기 자신을 속일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하며, 인간이 환경과 조건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준다. 본래 악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상황과 제도가 사람을 악하게 만든다는 ‘루시퍼 이펙트’는 H.아렌트의 ‘악의 평범함’과 그 의미가 유사하다. 국가 공권력을 조직 간 상호 견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권력의 분산은 비이성적인 실행을 줄이고 사회 시스템의 건강한 균형을 담보한다.
단지 숫자가 적힌 화폐의 가치는 사회적 계약이 지켜질 때만 유효하다. 약속과 신뢰가 무너진다면 화폐는 종이에 불과하다. 정치인과 주권자 사이에도 그러한 신뢰를 전제한 묵시적 약속이 존재한다. 정치인의 약속은 일종의 어음처럼 기능하지만, 아쉽게도 결제와 부도는 그들의 자의에 달려 있다. 선거가 결과 평가 방식이 아니어서 주권자들은 반복적으로 배신을 경험하게 된다. 정치 집단의 이해 상충으로 인해 개선 과정이 순탄하지 않지만, 사회 시스템의 합리적인 정비는 결국 주권자들이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는다. 이 가상 실험은 견제 없는 권력이 어떻게 공약을 묵살하고 기대를 훼손할 수 있는지 그 민낯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무대 위의 역할은 연기에 불과하다. 무대가 암전되면 역할극은 종료되고 그 배역은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다. 배우는 극에서 현실로 자신의 정체성을 전환해야 한다. 배역을 정체로 착각하고 농간 부리는 자들에게 받는 모멸감은 고통스럽고, 부도난 어음이 주는 굴욕감을 견디는 것은 더 어렵다. 스탠퍼드 프로젝트의 실험 결과는 인간이 얼마나 온전하지 못한 존재인지를 시사한다. 내면에 잠재된 이중성과 어두운 광기가 두렵다. 이처럼 허망한 인간의 이성에 여전히 지적 자율성을 기대할 수 있을까.
주용수 한경국립대학교 창의예술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