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도 분개 하는가"

시인 김수영은 오래전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안에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부드러워야 하지만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자신의 소시민적 삶을 나무랐다. 시인은 오롯이 이런 소시민적 삶을 통렬하게 반성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그는 이 시를 통해 정권의 부정이나 사회적 부조리에는 맞서 싸우지 못하면서 사소한 일에 대해 분노하는 자신을 미워했는지 모른다. 지금도 이런 일은 흔하다. 얼마 전 국회 환경노동위원회가 내분 중인 하이브 산하 연예기획사 어도어 소속의 걸그룹 뉴진스의 멤버와 어도어 대표를 국정감사에 참고인과 증인으로 불러 그 여파가 출렁이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걸그룹 멤버가 국감에 참석한 전례 없는 일에 국민들이 이런 철없는 의원들을 나무라면서다.

알다시피 이런 국정감사는 주요 국정 현안을 다루면서 정부 정책 수립과 집행에 문제가 없는지 따지고 점검하는 자리였음에도 국정이나 공적 이익과 관련이 없는 연예기획사 내부 분쟁마저 끼어 든 일이다. 그래서 직장 내의 일로 연예인 매니저가 인사를 받지 않고 무시하라고 한 것까지 국회에서 따질 문제인지 국회에 묻고 싶다. 결코 큰일 일 것 같지 않은 정치의 한 부분도 마찬가지다. 실상은 한 사람 한사람의 입에서 벌리는 대로 막 나오는 확인되지 않은 말들로 나라가 쑥밭으로 변해가도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특정세력들의 그것에 적지않은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다.

느닷없이 카톡에 등장한 오빠의 진위여부로 국민들을 불안하게 하는 이 정치가 과연 큰일인지도 나 역시 김수영 시인의 그 시구와 맞물려 분개하고 있다. 수 년전 보궐선거로 당선된 김영선 전 의원 측으로부터 수천만 원을 대가성으로 받은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는 사람이 대통령 부부와의 친분과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거나 여권 정치인들의 이름을 거명, 협박 수위를 높여가도 매일 그가 말하는 대로 용산이 끌려가고 그저 손사래만 칠뿐이다. 마치 그가 입을 더 열면 진짜 모든 분위기가 뒤집힐 것 같은 시간만 이어지고 있다. 그가 정말 감옥에 가면 한 달 만에 정권이 무너지는지, 아니면 휴전선 인근에서 북으로 날리는 전단지 풍선이 더 무서운 일인지 작은 일에 분개하는 국민들은 의문스럽기 마찬가지다.

다만 정치 브로커에 가까운 형사 피의자가 대통령 부부와 여당 지도부를 공개 협박하는 모습을 맥없이 뉴스를 통해 지켜봐야 하는 지지세력이나 통쾌함을 감추지 못하는 반대세력에 이르기까지 분개하는 모습은 점점 같아지는 느낌이다. 현재 상황이 모두 비정상인 것을 여야 의원들이 모르지 않아서다. 당연히 유권자들의 정치 혐오증도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 분개해야 하는가. 나라가 큰일 날 정치 브로커들의 말에 분개하며 개탄해야 하는지 아니면 앞으로 일어날 수도 있을 여러 정황에 분개하며 걱정하고 대비해야 하는지 살펴야 한다. 당장에 미국 대선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공히 보호무역 정책을 강화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100조 원에 달하는 대미 투자를 계획했던 한국 기업에 비상이 걸렸고 기업 관계자들은 기업 투자에 친화적이라는 미국의 배신이라고 입을 모으기 시작했다. 진짜 큰일이라는 얘기다. 그래도 정치판은 이 일에 분개하지 않고 있다. 미국 정부의 약속이 언제든 저개발 국가 정부에서처럼 뒤집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다. 미국이 강조했던 프렌드쇼어링이나 니어쇼어링 개념도 더 이상 없다.

어차피 정치나 경제 모든 얘기는 끝나가고 있는지 모른다. 참과 거짓을 떠나 이제 남은 것은 다시 국민들의 선택에 달려있다. 사실상 지금의 모든 결과 역시 지난날 국민 모두가 동의하고 찬성한 길이다. 그러니 누구도 탓할 수는 없다. 결과에 대한 책임도 나눠야 한다. 민주당이라고 그 반사이익이 올 것으로 오판하면 곤란하다. 선거의 시기는 곧 오고 또 바뀌는 이유다. 선거 앞에 그간 장사가 있었는가. 그래서 지금의 윤 대통령에 대한 실망이 이재명 대표 지지로 이어질 것으로 보고 조기 탄핵 공세에 나서봐야 자칫 커다란 오판일 수 있다. 이미 보수층은 민주당의 정권 퇴진 공세에 있는 대로 몸을 웅크리고 있다. 분명 자신들의 손으로 뽑은 대통령을 두 번이나 탄핵으로 물러나게 할 수 없다는 자존심이다.

윤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충심어린 마음이 결코 아니다. 자존심이 걸린 보수 자멸의 역사를 반복할 수 없다는 절박함 정도다. 과거 최순실이라는 인물이 국민 자존심을 건드려 정권이 넘어갔어도 또 정체불명 인사들이 지금 저러고 있는 그림을 인정하기 어려운 이유다. 그렇지 않아도 민주당이 내심 희망을 보였던 얼마 전 재보선 민심이 이를 증명했다. 그 결과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대표의 회동 결과도 이제 더 이상 궁금하지 않게 됐다. 지금쯤 알 것을 죄다 안 국민이다. 평론까지 서슴지 않는 유권자들이다. 믿고 싶은 구석대로 믿는 것도 어쩔 수 없게 됐다. 신뢰는 구석진 골목에 머물러 있다. 이미 오래전 진보사회로 굳어진 사실을 보수가 모르고 있을리 없다. 어쩌면 여당조차 정 안되면 마음만은 편했던 야당 시절을 그리워하는지 모른다.

이런 엉터리 같은 장님과 주술사 시리즈가 언제까지 갈지 모른다. 단지 보수도 진보도 이제 지쳐가는 모양새다. 이런 상황에 과거 문 정권의 화려한 등극처럼 탄핵으로 올라타고 싶은 민주당도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감기 걸려 만사가 귀찮은 사람에게 호사스러운 자리의 초대가 귀찮듯이 정당의 역할을 못하는 보수나 진보 양당에게 그 어떤 주문도 사치다. 우리 모두는 자신이 살아온 사회적 DNA를 쉽게 못 바꾸는 이유이기도 하다.

문기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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