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녕 태평성대인가... 위에서 한나라가 들이쳐 오고 동에서는 낙랑국이 견제해오니 내 나라 신세 가련타. 폭풍은 지동 치듯 불어오고 동풍에서 궂은 비가 퍼붓는디 이 어찌 태평성대란 말인가! " 드라마 ‘정년이’의 극중극 ‘자명고’에서 호동왕자(정은채 분)의 불꽃같은 대사다. 만화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 ‘정년이’가 시청률을 갈아치우며 오랜만에 안방에서 화제였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이 드라마 안의 문장은 국민이 긴 밤 꼬박 지새운 한편의 다른 드라마와 맞물렸다. 단지 과정과 구성에 정년이는 촘촘한 짜임새로 호응을 받은 반면 며칠 전 그 허술하기 짝이 없던 시간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정년이는 시청자인 국민들에게 최근 불안해진 국제 정세에 내심 신경 쓰이는 상황을 드라마 안의 대사 하나로 돌직구처럼 파고 들었다. 얼마 전 노벨문학상 수상에 들떠있는 대한민국의 현재 상황에 "정녕 태평성대인가"라는 시의적절한 화두를 던진 탓이다.

나는 이번 계엄과 관련한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며 커트 캠벨 미 국무부 부장관이 말한 "매우 문제 있고 위법한 행동으로 예측할 수 없었고 윤 대통령이 심하게 오판(badly misjudged)을 한 것 같다"는 부분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캠벨은 나름 미국 조야(朝野)의 한국통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래서 그가 한국 정치가 양극화가 심하고 분열돼 있는 것이 사실이라는 부분도 무시하지 못할 의견이었고 탄핵에 관한 많은 움직임, 특히 영부인에 대한 의문 등 대통령을 향한 어떤 압박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는 얘기에서는 간단한 감정이입마저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캠벨이 예고하거나 짐작하고 있는 앞으로의 일들은 그리 단순해 보이지만은 않다. "앞으로 정치의 영역에서 많은 일이 있을 것이고 몇 달 동안 한국이 도전적인 상황에 부닥치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물론 "우리의 목표는 한미동맹이 절대적으로 굳건하고, 우리가 한국과 함께한다는 걸 분명히 하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한국이 자신만의 수단·방법을 통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는 부분은 앞으로 미국이 우리에게 요구할 여러 방향을 예고하고 있다. 이미 끝난 미국 대선으로 자국내 정권 교체 등으로 불확실성이 고조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분명 우리 안에 불고 있는 대통령에 대한 탄핵 가능성은 광범위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고 탄핵이 이뤄지면 권한대행이 들어서고 그와 진지하게 협력할 세계 어느 국가가 거의 없게 될 것이라는 얘기는 섬뜩함마저 느껴진다. 계엄사태의 잠깐이라도 지금의 비어있을 시간, 즉 잃어버린 시간이 우리 자신에게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라는 예언 같은 추론도 포함해서다.

그나마 캠벨은 약간의 긍정적인 우리의 과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지난 태평성대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그것은 여러 면에서 우리의 민주주의 강도와 깊이에 대해 매우 안심할 수 있었다는 것인데 실제로 미국의 주요 당국자들은 비상계엄이 이뤄지기에 앞서 한국 측으로부터 아무런 통고를 받지 못했고 그럼에도 외교장관, 경제부총리 같은 키 플레이어들이 우리 안에서 빠르게 전개되는 상황에 매우 놀랐다는 얘기를 전하고 있다. 나 역시 이러한 언급에 동의하는 부분이고 그야말로 ‘서프라이즈’ 그 이상으로 여기고 있다. 묘하게도 정치판을 뒤흔들고 있는 명태균의 엄포가 현실이 돼 가는 수순도 뱀의 꼬리로 남기면서다.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배경으로 이른바 명태균 게이트가 주요하게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은 뒤로 하고 당장 옥살이를 하고 있는 명 씨가 지난 3일 창원지검의 구속기소 직후 변호인을 통해 "특검을 간곡히 요청한다"고 밝히며 무슨 내용들이 담겼는지는 몰라도 ‘황금폰’ 으로 불리는 휴대전화기를 아직 가지고 있다면 국민 앞에 제출하겠다고 밝힌 시점은 시제상 절묘하다.

해서 도무지 알 수 없는 일들은 이어지고 있다. 캠벨 같은 미국내 정치 거물의 지적과 현실적으로 우려가 되는 윤 대통령과의 통화를 추가로 폭로하거나 김건희 여사와의 대화를 공개할 수 있다는 뜻으로 알아달라는 명 씨의 그것과 오버랩 되면서다. 명 씨의 황금폰 안에 지난 대선 기간 사용해 각종 녹취 등이 담겨 있을 무시무시한 내용… 그래서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는 지금의 태평성대를 박살 낼 것으로 추측돼 같은 날 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면 모든 얘기는 운명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당분간 나락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명씨가 지난 10월 초 검찰 수사망이 좁혀오는 상황에서 언론을 통해 "내가 구속되면 정권이 한 달 안에 무너진다"고 주장한 얘기를 자꾸 끄집어 내는 몇몇 매체들의 시점은 정말 절묘한 계산 하에서 이뤄지는 술수로까지 의심될 정도다. 물론 국방장관이 몇 달전 계엄을 묻는 야당의원 질의에 "절대 그럴일은 없다"고 못을 박았지만 그 자신이 주도한 일로 알려진 지금처럼 그가 정말 입을 열면 세상이 뒤집혀질 수 있다는 얘기가 자꾸 뇌리를 스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이상하고 태평성대를 위협하는 일은 이외에도 더 있다.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의 말처럼 명 씨가 ‘특검을 하자’고 하는 게 사실상 본인이 가지고 있는 자료를 적극 제공하겠다는 의사의 표현이었고 이미 검찰에 관련 자료를 제공했다면 윤 대통령은 당연히 이러한 정보를 접했을 것이고 아마도 정상적인 방법으로 버티지 못하겠구나하는 판단을 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국회의원들이 여럿 있었다는 주장이다. 정작 이 의원이 하고 싶은 얘기는 여기부터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냥 필 받아서 하셨을 수도 있다" 는 얘기다. 그야말로 열 받아 즉흥적으로 대통령이란 사람이 태평성대를 걷어찼다는 말을 믿어야 하는지도 생각은 돌고 또 돌고 있다.

분명한 것은 그 비상계엄을 선포했던 윤석열 대통령이 야당 주도로 탄핵소추안이 발의돼 국회 표결만을 앞두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는 돌고 또 돌고 있었다.

문기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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