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가 얼마 전 이재명 대표에 대해 간단한 한 줄 평가를 했다. 그것은 이 대표가 인권 변호사 출신으로 오랜 기간 좌파 정치인으로 이상주의적 목표를 추구해왔지만 미국·북한·중국과의 관계 등 한국이 직면한 가장 논란이 되는 문제에 대해 애매한 입장을 취해왔다는 소개다. 본인이 이러한 기사를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뒤로하고, 나는 이 대표가 엊그제 굵직한 재계 관계자를 만나 트럼프 취임에 따른 수출 기업의 애로사항을 청취하며 광폭 우클릭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는 소식에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분명 중도층 표심을 겨냥한 주제다. 더구나 민주당에 어울리지 않을 상속세 공제 한도를 높이는 법안 처리를 시도하는 등 최근 이 대표의 우클릭 행보의 배경에도 이를 ‘합리적 유연함’으로 봐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갇혀있는 윤석열 대통령과 상대하는 이미지를 무조건 선점하고 보자는 의도인지는 가늠이 안 되고 있다.

어쩌다 민주당 핵심가치가 실용주의가 됐는지는 짐작은 가도 지금으로서 확증은 없다. 물론 이에 대해 당장 날을 세우고 있는 김동연 경기지사가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와 철학을 실용주의적으로 접근해서 푸는 것은 필요하지만, 실천 방법이 바뀔 수는 없다"면서 "추구하는 가치와 철학은 그 정체성을 분명히 유지해야 한다"라는 말이 오히려 민주당 다운 얘기일 수 있다. 이런 이 대표의 변신과정에 김 지사가 감 놔라 배 놔라 하기는 유시민의 말대로 어색한 면이 없지 않겠다. 김 지사 역시 이 대표 일극체제를 비판한 비명계 대권주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가 유시민 말대로 망하는 길로 가고 있는지는 지나갈 시간이 증명하겠지만 유시민이 비교적 정확히 본 당장의 게임 구조는 지난 총선 때보다 극화된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다만 이 대표가 아니면 누구를 찍어야 하냐는 대목은 보수에서 마치 윤 대통령이 없으면 보수가 유지될 것 같으냐는 억지춘향식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당장에 지금 보수는 윤 대통령 다음을 거론하는 측과 무조건 다시 옹립해야 한다는 강경보수, 심지어 윤 대통령처럼 한 방에 인기를 몰아 어쩌다 후보군에 선두를 유지하고 있는 김문수 장관에 이르기까지 정신이 없을 지경이다. 그 양상은 민주당도 앞으로 비슷한 지경이 되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이 대표가 코어에 있다. 그 안에 유시민이 말한 ‘배은망덕’한 인물이 김동연 지사이고 이 대표한테 붙어서 지사된 사람이라는 표현이 조금은 멋쩍고 치사해 보여도 과거사를 돌아보면 비슷한 양상이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려운 그림이었다.

심지어 듣기 따라 김 지사가 단일화 감도 아닌데 단일화 코스를 밟아 민주당에 들어와 경기지사가 된 것이며 이 대표 지지자들이 김동연을 밀어서 된 것이라는 언급 역시 표현이 거칠어서 그렇지 어느 정도 인정되는 대목인 탓이다. 다시 이 대표의 실용노선에 대해 보자면 지금 이 대표는 얼마 전 추경 편성 언급을 시작으로 정치하는 입장에서도 급변하는 국제 상황이 사실 당황스러울 정도라는 말이 당연한 지경이다. 물론 민주당이나 다른 야당과 노동계에서 혼란스럽고 일부에서 반발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지금 이 대표는 탄핵과 윤 대통령을 향한 포화를 접어두고 경제에 대한 중지를 모을 때라는 말을 자주 하는 것은 어색하기 짝이 없다. 이런 변신이 좋게 말해 ‘실용주의 노선 채택’이라고 규정하고 있어도 우클릭 행보가 물 흐르듯 순탄할지도 의심스러워서다.

문제는 모두 그리고 갑자기 경제에 몰려있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에서 빈곤과 사회주의는 종종 혼동되거나 동의어처럼 사용되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될 때마다 해결하기 위한 정책적 대안으로 사회주의적 접근법이 거론되고 빈곤계층 사람들을 사회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진 집단으로 간주하는 경향도 없지 않다. 하지만 빈곤과 사회주의는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경제학에서의 빈곤은 단순히 개인의 노력 부족이나 경제적 무능력 때문만이 아니고 구조적인 요인, 경제 시스템, 교육 기회, 노동시장 환경, 정부 정책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형성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래서 선진국이나 우리처럼 시장경제를 채택한 국가에서도 빈곤은 존재한다. 물론 사회주의는 가난을 절대 해결할 수 없다. 경제적 비효율성에서다.

한마디로 국가도 해결하기 어려운 빈곤은 경제적 문제이지, 특정 정치 이념과 반드시 연결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점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두드러지게 볼 수 있는 현상 중에 강남좌파라고도 불리는 부유한 계층 중에도 사회주의적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다. 결국 빈곤을 사회주의로 귀결짓는 단순한 논리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 길게 봐서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념적 논쟁을 떠나 실질적인 해결책이 필요하고 사회 안전망 강화 등과 같은 정책적 접근이 효과적일 수 있다. 보수와 진보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거대 담론에 갇히면 그 무엇도 얘기하기 어렵다. 남은 얘기는 이 대표가 이런 실용자본주의에 언제까지 익숙해질 것인가에 달려있다. 일례로 반도체특별법을 계기로 주 52시간제가 논란이지만 사실은 반도체 같은 특정 산업·직군을 넘어 본질적 문제를 짚어봐야 하는 데 있다. 이 대표가 이를 모를 리 없고 그 주위에서도 진작부터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했을 주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이 대표와 민주당은 눈 감고 귀 막고 있었다. 그러자 박스권에 갇힌 이 대표의 결정에 다시 실용이 꺼내지고 중도층에 경제를 앞세워 유인하고 있다. 딥시크를 만들어 미국을 아래로 보는 중국은 당장 노동법 위반 단속 걱정 없이 연구·개발에 매진하고 있다. 중국이 자본주의 국가인가. 족쇄에 묶여 있을 수는 없다. 이 대표가 귀를 열었다면 믿고 있는 지지세력을 바꾸길 바란다. 그것은 국가와 국민이다. (蛇足) 불현듯 표 앞에 장사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문기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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