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트럼프가 백악관에서 젤렌스키에게 한 번도 아닌 여섯 차례나 "당신에게는 내밀 카드가 없다"라고 면박 아닌 질타를 한 장면은 당장 우크라이나의 현실을 직감하게 하고 우리를 비롯한 소위 우방국에게도 여러 교훈을 주고 있다. 구 소련 해체로 저절로 독립국이 됐음에도 지금의 우크라이나는 소피아 로렌의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영화 ‘해바라기’의 배경 속, 한 낮 아련한 아름다운 풍경에 머물지 않는다. 당장 보이는 현실은 그간 정치 속 아둔한 사람들끼리 서로 휘둘려 믿고 살아온 수 십년의 세월 속에 결국 국제사회 힘으로 재편된 전쟁속 폐허의 우크라이나다. 알다시피 이런 우크라이나는 독립 이후 탈냉전과 동서 화해, 소위 팍스 아메리카나로 불리는 미국 일극 체제하의 평화 무드 속에 탈 없이 지내왔다.

구 소련 붕괴 직후 미국과 러시아에 이어 세계에서 셋째로 많은 핵무기를 보유한 나라가 아니었던가. 듣기에도 무시무시하고 엄청난 양의 중거리 핵미사일과 대륙간탄도미사일에 탑재 가능한 전략 핵탄두 수는 상상 이상이었고 중·단거리 미사일과 전략 폭격기용 전술 핵무기도 러시아와 미국을 초토화 시킬 수 있는 수량이었다. 게다가 유럽 최대 규모의 원전 시설에 기반한 자체 핵무기 제조창까지 갖고 있었던 우크라이나는 불안감을 느낀 미국과 기존 핵보유국들에 의해 해체된다. 핑계야 간단했다. 우크라이나 소유의 일부 핵무기가 테러리스트의 손에 들어갈 가능성이다. 당장 전쟁중인 러시아도 이런 핵무기가 자국을 겨냥할 가능성을 염두에 뒀으리라.

때 늦은 후회를 뒤로하고 홀로 트럼프와 J D 밴스 부통령과 동석한 자리에서 푸틴에 대한 원망의 소리를 하며 격렬한 말싸움을 했지만 쫓겨나다시피 백악관을 나와야 했다. 젤렌스키는 지금 우울하고 슬프다. 하지만 그는 다시 감정을 다잡아 트럼프에게 사과하고 나라를 추스르고 있다. 명실상부한 지도자의 모습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지도자가 지금 없어 제대로 된 만남조차 어려운 지경이다. 그럼에도 북한이 하루가 멀다 하고 미사일을 쏘아대도 부산에 들어온 미국의 항공모함을 보며 안위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게임은 곧 멈춰질 것이 최근의 상황에서 답을 얻을 수 있다. 과연 북한이 우리를 향해 핵을 쓴다면 미국이 바로 핵무기로 응징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트럼프가 집권하는한 분명 장사속 계산이 우선일 것이다.

핵우산을 거론하며 미국이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해준 시대는 이제 끝났다. 직접 당하지 않는 한 그 앞에 계산기가 우선일 것이라는 추측이 더 맞다. 일이 이 정도라면 현명한 우리 쪽에서 먼저 스스로 살아남을 방도를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손 놓고 앉아 있을 수 없는 노릇에서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그제 미국이 우리 편에 없을 때를 대비해야 한다고 일갈했다. 유럽 각국 방위를 위해 프랑스의 핵 억지력을 활용하는 방안을 논의한다는 단호한 얘기다. 대국민 연설에서다. 미국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입장을 바꿨고 동시에 유럽에 관세를 부과하려 한다는 얘기는 그렇다 해도 "우리는 새 시대에 살고 있고, 이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고 말한 대목에서 앞으로의 세계가 어떻게 재편 될지 까지 전망이 가능하다. 물론 여기에 우크라이나를 버리고 평화를 얻을 수 없다는 지적도 포함해서다. 중요한 얘기는 마크롱의 결연함에서 엿볼 수 있다. 유럽 국가들이 단단하고 지속 가능한 평화 계획을 세웠고 평화에 대한 합의가 이뤄진다면 유럽의 평화유지군이 파견될 수 있다는 얘기다.

트럼프가 젤렌스키를 향해 겁박하던 제3차대전의 물음이 현실화될 것을 염려하는 온갖 상상이 펼쳐지는 대목이다. 마크롱은 알고 있다. 미국의 유럽에 대한 안보 공약 약화 우려다. 아니 약화가 아니라 포기일 수도 있다. 그래서 마크롱은 미국이 유럽 편에 설 것이라고 믿고 싶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도 대비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한 마디로 유럽의 미래가 미국이나 러시아에서 결정될 필요는 없다는 의지도 함께. 나는 마크롱의 여러 얘기 속에서 "이 위험한 세상에서 구경꾼으로 남는 것은 미친 짓"이라는 구절에 동의하며 심지어 가슴이 먹먹해 지는 것도 느꼈다. 과거 프랑스의 드골은 케네디 미국 대통령에게 미국은 파리를 위해 뉴욕을 포기할 수 있느냐며 프랑스의 독자적 핵무기 개발을 선언했다.

언제까지 미국의 핵 보복에 편승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이미 깨달은 얘기였다. 남은 것은 이 모든 상황에 우리의 선택이다. 독자적 핵보유를 외치는 정치인들이 차고 넘치고 있다. 과거 핵과 관련된 얘기만 나와도 슬슬 꽁무니를 빼던 인사들이다. 물론 우리가 핵 보유에 나서는 것 자체가 안보를 위해 긴요하고 절실해도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끼리의 게임 룰을 넘기는 어렵다. 문제는 서서히 모든 양상이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가 우리가 감당 못할 주문을 해서 우리가 망설이고 있을 시간에 경제는 물론 국방도 무너질 확률이 크다.

젤렌스키 이전에 나라를 미국의 주정부로 넘기라는 모욕적인 말을 들은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가 결국 미국산 제품에 즉각 25% 보복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한 시간에 더그 포드 온타리오주 총리는 미국과의 무역 전쟁이 지속될 경우 미국으로 공급하는 전기에 25% 할증료를 부과하거나 공급을 전면 중단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과 전력망이 연결돼 있는 점에 강경수를 둔 것으로 600만 가구가 사용할 수 있는 규모의 전기를 수출하고 있는 캐나다 주 정부의 남은 결기다. 결과야 두고 봐야겠지만 뭐 이 정도 카드는 가지고 있어야 모멸의 길은 면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비단 나 뿐인가 하는 마음도 문득 들었다. 그 나마 트럼프 앞에서 모멸감을 느낄 지도자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지도 함께….

문기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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