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다른 이의 팔에 안겨있는 젊은것들/ 나무 위 새들....../ 온갖 잉태하고 태어나고 죽는 것들....../ 나이 들지 않는 지성의 유물들을 방치하고 있다." W. 예이츠의 시 ‘비잔티움으로의 항해’는 젊음의 상실과 노화의 두려움을 초월하고 영적 가치를 추구하라는 깨달음을 준다. C. 매카시가 예이츠의 시에서 영감을 얻어 쓴 소설을 코헨 형제가 스크린에 올렸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는 인간의 도덕적 한계를 탐구하며, 선택이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는 요인임을 보여준다.

이 작품의 열린 결말은 불편함을 준다. 권선징악의 안도감이나 해결을 기다린 보상이 없다. 찜찜한 종결은 보는 이를 사유의 공간에 계속 붙잡아둔다. 익숙한 도덕관념, 관습적인 문제해결, 당연한 공권력의 승리 같은 진부한 패턴을 찾을 수 없다. 마치 ‘왜 세상에 꼭 그런 해결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반문하는 것 같다. 작품은 우리의 습관적 사고가 얼마나 빈약하고 획일적인지를 반문한다. 이유 없이 피해 보는 사람들, 냉철함과 도덕성이 쇠락한 공권력, 그리고 악마의 무지막지한 폭력은 사회 저변의 무작위적 현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주인공 모스의 단순한 선택은 삶의 모든 것을 바꿔버린다. 우연히 돈다발을 획득하고 난 후, 그의 삶은 혼돈에 빠진다. 그는 행운이 가져다줄 희망에 무책임한 선택을 하고 만다. 그 선택은 잔인한 대가를 예상하지 못한 채 결말을 향해 치닫고, 그 그늘은 그에게 혹독한 책임을 묻는다. 욕망과 책임 사이에서 내린 선택의 결과는 과도하게 가혹하다. 작품은 모스의 가벼운 결정을 무거운 결과로 그려내며, 운명이란 이런저런 선택의 필연적 결과라는 메시지를 던져준다.

살인자 시거의 무자비한 행동은 변연계가 없는 파충류의 냉혹한 속성을 내보인다. 자신과 상대와의 관계나 상황 따위는 염두에 없다.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이 기계적으로 폭력을 사용하며, 마치 생사의 운명을 쥔 신의 역할을 자처하듯 집행한다. 시거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다른 이의 목숨은 전혀 숙고의 대상이 아니다. 그는 동전 던지기로 살해 여부를 결정하고, 누구도 불가항력의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고 여기게 행동한다. 법과 이성의 통제를 전혀 받지 않는 냉혈한이다.

보안관 벨은 시대의 변화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그는 스스로 무력감을 가지고, 자신의 시대가 저물었음을 토로한다. 단순히 나이 듦에 관한 회한이 아니라, 사회도덕의 변화 수용을 버거워한다. 살벌한 사건을 추적하며 느끼는 자신의 한계에 깊이 회의한다. 작품은 변화하는 시대에 드러나는 공권력의 무기력을 들춰내며, 도덕적 보안 개념과 과학적 공무집행의 당위를 지적한다.

인간관계의 갈등과 사건에는 주로 돈이 그 중심에 자리한다. 이 영화에서 돈은 목표를 붙잡는 기제로 작용하며, 사건을 이끌어가는 크랭크축 역할을 한다. 돈을 획득한 자와 찾으려는 자, 폭력을 추격하는 자가 펼치는 삼각 구도가 긴장을 떠받친다. 결국, 주인공 모스는 죽임을 당하고, 돈다발은 엉뚱한 강도들이 탈취해 달아난다. 살인마 시거는 돈을 찾지 못한 채 상해를 입고 종적을 감춘다. 보안관 벨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직무를 접는다. 세 사람은 죽음과 살인과 좌절을 떠안고 모든 것을 잃는 것으로 영화가 끝난다.

한반도 문제의 인식이 달라진 미국을 상대할 우리 외교의 험한 미래를 예견한다. 민감 국가로 지정되어 우방의 위상도 무색해졌다. 경제, 국방, 외교, 관세, 분열된 사회 통합의 쓰나미를 감당해야 할 차기 정부의 과제만 연일 늘고 있다. 사법기관 공격을 선동하는 광기가 거리를 덮고, 사회적 합의의 경계를 넘는 행동이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 인간의 이성은 신뢰할 만한 것인가. 공권력의 비상식적인 형사법 적용에 심각한 불공정 시비가 일어났다. 권한의 크기와 책임의 분량이 비례함을 잊은 것일까. 두어 명 책임자의 일탈에 공적 질서의 근본이 흔들린다면, 사법 체계의 견제 기능에 심각한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닌가.

주권을 지킨 시민, 군주를 꿈꾼 권부, 반역을 심판하는 사법부의 트라이앵글 구조가 작품의 틀과 유사하다. 국가의 기둥은 국민이며, 국민이 주권자다. 국민의 권한을 위임받은 소수가 공동체의 존립을 위태롭게 한 사실에 분노한다. 일본에 당한 을사년의 치욕을 소환하며, 오늘 우리는 을씨년(乙巳年)스러운 역사의 분기점에 다시 서 있다. 헌법재판소의 책무성과 존재감이 무거워졌다. 시작과 끝은 인과 관계를 맺고, 오늘의 선택은 내일의 필연적 결과를 잉태한다. 과거가 현재를 구할 수 있느냐는 한강 작가의 사유적 물음에 사법이 답변해야 할 차례다. 우리의 오늘이 후손들의 미래를 구할 수 있을 것인가.

주용수 한경국립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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