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성의 기호, 문명의 혈관
인류 문명화 과정에는 공통의 상징적 기호가 필요했다. 생존과 협력, 전쟁과 평화를 위해 인류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매개체를 발명했다. 그 형태는 시대에 따라 달랐다. 오늘날 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영어’와 ‘달러’다. 이 두 가지는 보편적 매개체(Universal Medium)로서, 문명의 피를 순환하는 혈관과 같은 역할을 한다. 영어는 의사소통의 ‘보편적 언어’이며, 달러는 경제 교환의 ‘보편적 화폐’로서 기능하고 있다.
‘영어’와 ‘달러’는 국가, 지역, 문화, 산업, 개인의 경계를 넘어 상호 관계를 만들어내고, 에너지의 흐름이 가능하도록 주관하는 전달 매체다. 이 매체의 보편성은 사용의 빈도나 영역의 범위에 국한되지 않는다. 국제적 구조와 규범을 만들고,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권력을 상호 연동한다. 특히 인종, 국가, 민족, 개인의 정체성을 좌우하고, 권력 쓰는 일에 큰 영향력을 갖는다.
영어가 ‘의미’의 전달체라면, 달러는 ‘가치’의 전달체다. 서로 다른 성격이지만, 그 기능은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둘 다 ‘신뢰(trust)와 합의(consensus)’라는 무형의 기반 위에서만 오직 유효하게 작동한다. 참여자 모두가 그 규칙을 받아들일 때만 사회적 효력이 발생한다. 철저하게 합의에 기반한 신화적 구조물이며, 그 합의로 맺은 신뢰는 공동체를 지탱하는 규범으로 작동한다.
#보편성의 그림자, 권력과 위계
이 보편성의 편리함은 아쉽게도 권력의 불균형 문제를 불러온다. 영어는 소통의 언어를 넘어, 문화와 지식의 권력을 구조화한다. 영어를 잘하는 것은, 지식 플랫폼에의 접근과 글로벌 대화에 참여할 자격을 갖추었다는 뜻이다. 달러는 매매의 수단을 넘어, 국제 정치와 경제 지배의 구조를 반영하는 기호다. 달러가 강세일 때, 많은 국가는 그 통화정책의 그림자에 눌려 숨을 헐떡이고, 자국의 정책 자율성을 희생하며 고통을 당해야 한다.
‘영어’와 ‘달러’는 의미가 흐르는 ‘구조화된 움직임’이다. 언어와 화폐는 이제 존재의 방식을 규정하는 구조 권력이 되었다. 그 흐름은 세계를 연결하거나 나눈다. 세계인이 영어로 소통하지만, 그 무게는 균등하지 않다. 달러가 자본을 순환하게 하지만, 그 혜택은 평등하지 않다. 마치 어떤 악기는 늘 선율을 맡고, 어떤 악기는 항상 보조적 비트에만 머물러있는 것과 같다. 누구나 참여할 수는 있지만, 그 역할과 이익은 편차가 너무 크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불균형과 불평등 속에서 살고 있다.
#실존적 경고, 현실과 미래의 경계
‘영어’와 ‘달러’. 이것은 말과 돈, 의미와 가치, 인간과 구조 사이의 다층적 의미를 품은 현대의 상형문자다. 강물처럼 유유히 흐르다가도, 종종 일상의 평온을 위협한다. 지난 겨울, 대한민국이 국란의 위기에 처하자, 주식과 환율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화살을 쏘았다. 한 번도 경험하지 않았던 숫자였다. ‘영어’와 ‘달러’가 세상의 혈류를 지배하는 한, 강대국의 관세정책 강화는 매우 위협적이다. 그 두려움은 아직 단단하지 못한 우리 공동체의 생사가 달린 실존의 문제다. 우리는 그 험한 물결을 타고 시간과 재화를 교환하며 살아가고 있다.
국내 정세의 불안정은 공동체 존립을 또다시 위협할 수 있다. 국제 상황의 불균형은 더 가혹한 계산서를 언제라도 우리에게 들이밀 수 있다. 인공지능이 새로운 ‘언어’를 만들고, 디지털 통화(通貨)는 새로운 ‘화폐’를 예고하고 있다. 이들은 장차 영어와 달러의 권위를 위협할 수 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층위의 지배 권력을 만들어낼까. 새로운 매개체의 등장은 문명의 이동을 알리는 예후 중 하나라고 한다. 낯설고 불안정한 미래형 ‘보편적 매개체’들의 가능성을 우리는 어떻게 선점해 나갈 수 있을까.
정치 안정, 사법 정의, 공직자 윤리, 행정수반의 지도력, 구성원의 시대정신만이 냉혹한 문명을 살아내는 길이다. 우리가 풍랑을 일으키기는 어려워도, 오는 쓰나미를 이겨낼 수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내일 새로 뽑힐 대통령의 책무가 막중해졌다. 국가 지도자가 이 위기를 극복하고, 자기 능력을 발휘하도록 구성원의 너그러운 지지가 필요한 시점이다. 30여 년 전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디지털 강국으로 도약했던 우리의 저력은, 세계사의 파고 앞에서 다시 그 진가를 증명해야 할 순간을 마주하고 있다.
주용수 한경국립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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