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천년, 고려시대의 경기문화] (26) 국도, 개경의 문화유산
⑥ 고려청자의 생산과 소비-세계 최초 하이테크 기술의 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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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시 방산동에 위치한 청자와 백자를 굽던 가마터이다. 이곳은 1997년과 1998년 2차례의 발굴조사 결과 9∼10세기경 도자기를 굽던 시설로 밝혀졌다. 지금 남아 있는 가마의 길이는 35.8m이며 아궁이, 굴뚝, 옆면 출입시설 7곳, 가마벽체들이 있다.
고려시대 수도였던 개경을 중심으로 경기 지역은 우리나라 도자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고려 초인 10세기경 중국의 새로운 요업기술을 받아들여 본격적으로 청자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경기 지역에는 국가의 주요 기관들이 집결해 있었으며 왕실과 관료, 상업, 사찰 등 풍부한 도자 소비처가 집중되어 있었다. 이것은 이전부터 전해진 고화도의 도기 기술이 바탕이 되었으며 이후 크게 발전하여 고려 특유의 청자를 제작하며 세계적인 도자로 자리잡는 초석을 이룬다. 당시의 청자 제작기술은 전세계적으로도 중국과 고려만이 보유한 하이테크 기술이었다. 약 천년전 고려시대 경기 지역에 갑자기 나타난 고급 청자 기술은 어떤 숨겨진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지, 도공들이 남긴 청자 파편의 흔적을 따라가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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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당 9세기(월주요) 해무리굽 완으로 만들어진 찻잔이다. 해무리굽 완은 삿갓처럼 측사면이 많이 벌어지고 굽의 접지면을 해무리처럼 동그란 형태로 좁고 낮게 깎은 형태를 말한다. 이 찻잔은 높이 3.8cm, 입지름 14.2cm, 굽지름 6cm다.
#차의 유행과 찻잔에 대한 열망으로 시작된 청자의 생산

통일신라 말 자신의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한 선종(禪宗)의 유행으로 좌선이 중시되었고 이를 위해 정신을 맑게 해주는 차를 마시기 시작하였다. 차의 유행은 이를 담는 찻잔의 수요와도 맥을 같이한다.

이것은 중국에서부터 유래하는데 당대 안녹산(安祿山)의 난 이후 호족들의 종교로서 선종이 널리 퍼졌고 차를 마시기 위해 청자를 사용하였다. 이렇게 중국에서도 차의 열풍과 함께 찻잔인 청자의 기술 발전과 생산량이 증가하게 된다. 동양 차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육우(陸羽)의 ‘다경(茶經·760년)’에는 절강성의 월주(越州) 찻잔이 청자 찻잔 중 최고라고 쓰일 정도 였다. 중국에서 차의 유행은 통일신라시대 중국 유학 선승들이나 학자들을 통해 익숙해지고 국내에까지 유입되기 시작한다. 차문화가 상류층을 중심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왕실과 사찰, 귀족 계층에 퍼지게 되었다. 차 문화의 확산은 덕흥왕 3년(828년) 신하 대렴이 당(唐)에서 가져온 차나무를 지리산에 심어 국산차 재배를 시도하기에 이른다. 통일신라 말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차를 마시는 풍습이 고려 초로 이어지면서 그 수요가 증가하고 직접 만들고자하는 욕구가 강해져 국내에서 생산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또한 10세기 전반 중국은 당이 멸망하고 오대(五代)라는 정치적 혼란기를 겪었고 한국 역시 후삼국의 변화기에서 중국 도자의 수입은 어려워 졌고, 국내 생산은 불가피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경기 지역에서 국내 최초로 청자를 만들다

차의 유행과 함께 찻잔의 수요는 확대되고 결국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생산을 하게 된다. 그것이 경기도 일대에서 발견되고 있는 초기 청자 가마터들이다. 청자를 만들기 이전인 통일신라시대에는 토기 계통인 회청색 경질토기가 일상용기의 형태로 변형되어 계속 제작되었고 회유(灰釉)의 기술이 있었다. 이것은 고려청자의 탄생이 있게한 기술적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고 고려시대 접어들면서 중국 당말오대(唐末五代) 월주(越州) 지방 청자의 영향으로 유리처럼 매끄럽고 단단하며 옥(玉)과 같이 아름다운 자기가 고려 초 경기 지역에서 만들어진다.

경기 지역에서 청자를 만들게 된 최초의 흔적은 벽돌가마와 선해무리굽·해무리굽 완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해무리굽 완이란 삿갓처럼 측사면이 많이 벌어지고 굽의 접지면을 해무리처럼 동그란 형태로 좁고 낮게 깍은 형태의 찻잔을 말한다. 선해무리 굽이란 해무리 굽보다 먼저 만들어져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벽돌가마란 도자기를 굽는 공장의 재료를 벽돌로 한 경우를 말한다. 도자기를 굽는 도자가마는 진흙으로 만들어져 있지만 처음 청자를 굽던 도자기 공장인 가마는 벽돌로 지어졌다. 경기 지역에서 벽돌가마의 흔적은 황해도 원산리, 용인시 서리, 시흥시 방산동, 고양시 원흥동 일대에 위치하고 있고 우리나라 청자문화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중 대표적인 예로 시흥 방산동 청자가마의 경우 벽돌을 재료로 만든 것으로 40×2.2m 크기에 7개의 출입 시설을 갖춘 오름식 가마이다. 이곳에서 선해무리굽 완, 해무리굽 완, 나팔구연 집호(차주전자), 탁잔, 발(鉢) 등이 발견되었다. 발굴된 유물의 50% 이상이 찻잔으로 밝혀져 당시의 열풍이 짐작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곳에서 청자를 만든 사람들이 남긴 다양한 글자들이 유물들에서 발견되었다. 그 중 지명과 시기를 추측해 볼 수 있는 ‘봉화(奉化)’, ‘갑술(甲戌)’이라는 글자가 눈에 띤다. 봉화는 절강성 북동쪽에 위치한 ‘봉화현(奉化縣)’을 지칭하며 오대 초기부터 청자 제작 활동을 한 지역으로 보고 있다. 갑술은 고려 건국을 염두해서 914년과 974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도공들과 직접 관련이 있는 ‘오달(吳達)’, ‘화(吳)’, ‘범(范)’, ‘목(木)’ 등의 성씨와 이름이 발견되었다. 고려초 신분이 낮은 도공임에도 불구하고 성씨를 가진 점과 당시 고려에 없는 성씨를 가진 점을 근거로 중국에서 망명한 도공으로 추정하고 있다.

방산동과 더불어 배천 원산리와 용인 서리 가마들의 공통된 특징은 40m에 달하는 벽돌가마 구조에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은 선해무리굽 완, 해무리굽 완, 나팔구연 집호, 화형잔 등으로 대부분 차도구와 관련된 것으로 그 양상이 매우 흡사하다. 그럼 이들은 정말 중국에서 왔을까? 이와같은 벽돌가마에 청자 찻잔의 조합이 중국에서도 발견된다. 바로 중국 절강성 상우현의 상림호 일대에 있는 오대의 월주요와 청자이다. 양국의 동시기 청자 생산 양상을 통해 고려의 적극적인 선진 기술의 수용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11세기 초 벽돌가마의 운영은 막을 내린다. 당시 청자의 제작은 중국의 최첨단 선진 기술이었고, 맑고 푸른 빛깔의 청자를 만든 우리나라는 중국과 더불어 세계에서 유일한 청자 생산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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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시 방산동에 위치한 가마터에서 발견된 청자와 백자 요지.
#왕실을 위한 제기를 만들다

청자 제작 초기 상황을 알 수 있는 명문 도자로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의 ‘순화사년(淳化四年)’ 명(銘)항아리가 있다. 이 항아리는 입이 넓고 곡선의 굴곡이 완만한 몸통을 가지고 있으며, 태토는 백토에 가까우나 빛깔은 백자도 청자도 아닌 엷은 황·갈·녹색을 띠고 있다. 그릇의 바닥에 음각으로 새긴 글씨가 남아있는데, ‘순화사년계사태묘제일실형 기장최길회조(淳化四年癸巳太廟第一室亨 器匠崔吉會造)’라고 쓰여있다. 순화4년(성종 12년, 993년) 계사년에 태조 왕건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사당인 태묘 제1실에서 쓰는 의례용의 항아리로 최길회라는 장인이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형태의 제기는 962년 송나라 섭숭의((소곤거릴 섭)崇義)가 편찬한 예서인 ‘삼례도(三禮圖)’의 태준(太尊)으로 확인되며, 북송의 예서가 고려에 들어와 왕실의례에 사용하는 그릇을 만드는데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왕실의 가례를 위한 제기가 황해도 배천국 원산리 요지에서 발견되었다. 폐요 직전의 2호 가마 바닥 최상층에서 청자순화3년(靑瓷淳化3年·성종 11년, 992년) 명고배(銘高杯)의 발견으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청자의 굽바닥에 ‘순화삼년임진태묘제사실향기장왕공탁조(淳化三年壬辰太廟第四室享器匠王公(부탁할 탁)造’라고 음각을 하여 이 청자가 길례대사(吉禮大祀) 가운데 종묘(宗廟)의 4실(室), 즉 고려 4대 광종의 묘당(廟堂)에 배향하기 위한 헌기(獻器)임을 알 수 있다.

성종대 유교를 통해 고려왕조의 중앙집권화를 꾀하고자 했던 배경에서 제작된 제기로 추측되며, 제기들은 모두 고려 초기 경기 지역의 벽돌가마에서 제작된 자기이다. 이를 통해 왕실 의례에 소용되는 도자 그릇을 경기 지역 벽돌가마에서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고려 왕실과 중국 절강성에 자리한 오월국(907-978)과의 일정한 관계도 주목할 만하다. 10세기는 오월국의 영역 안에 있었던 월주요의 청자 제작이 활발하던 시기이다. 태조 년간 오월국의 추언규와 박암 같은 문사들이 고려에 왔었다는 기록과 최행귀가 오월국에 유학하여 요직을 제수받기도 하였다. 이렇게 친밀한 외교관계와 왕실과 귀족들의 왕래는 경기 지역에서 청자 기술을 도입하게 되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왕실, 관료, 상업, 사찰 등 풍부한 소비처도 집중되어 있어 청자를 생산하기는 적임의 장소였을 것이다.

그러나 가마를 제작하고 운영한 주체가 지방의 호족세력인지 국가적 차원에서 직접 관여를 했는지에 대한 단서가 부족하여 정확한 정황을 알기는 어렵다. 다만 경기 지역의 권력층에서 오월국과의 교류를 통해 도공을 데려와 대대적인 청자 제작을 시작하였고, 이들은 왕실의 제기까지도 제작하는 긴밀한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부터 중국에서 불어 닥친 차례(茶禮) 열풍에 힘입어 많은 중국산 다완들이 유입되었고, 이를 모방·제작하려는 선망이 고려시대 청자 발생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렇게 10세기부터 시작된 청자의 제작은 다례의 유행과 함께 기술의 성장과 생산량이 증가를 초래하였다. 청자의 생산 초기부터 높은 기술력을 과시한 우리의 청자는 원조인 중국과도 어깨를 견줄만큼 대단한 정도였다. 경기는 고려시대의 개국과 함께 천년의 시간 동안 적극적으로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고급 문화를 향유한 지역이었다. 당시 최첨단 유행이자 최고 기술인 고려 청자는 경기 지역에서 시작되었고, 우리나라 청자 제작의 길을 열었다.

김영미 경기도어린이박물관 학예운영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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