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천년, 고려시대의 경기문화] (35) 경기 남부의 문화유적
② 고려의 3경 운영과 남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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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성능행도
#문종의 남경 건설 노력

고려에서는 건국 직후부터 12대 또는 120년이 지나면 개경의 땅기운이 다한다는 도참설이 공공연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용의 후손인 고려 왕실은 12대가 지나면 그 기운이 다한다”는 것이다. 개경의 땅기운을 보완하는 방법으로 인근의 명당에 이궁(離宮)이나 임시 궁궐을 짓고 국왕이 순행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다른 곳으로 천도하는 방법이 적극 모색되기도 했다. 문종 때의 남경 건설은 ‘도선기’에서 제시한 개국 후 160년보다 10년 앞선 조치로, 이런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문종은 고려 왕실에서 12대에 근접한, 개국 120년과도 근접한 시기의 국왕이었다. 예성강 서쪽의 병악(餠嶽) 남쪽에 장원정이란 건물을 지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남경 건설과 관련한 첫 번째 일은 1067년(문종 21) 12월에 “양주를 남경유수관으로 삼고 인근 지역의 백성을 이곳으로 옮기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정확히 1년만인 다음해 12월에는 “남경에 새 궁궐을 지었다.” 동경을 대신하여 남경이 고려의 삼경제 중에 하나로 편제되었다. 고려시대에 경(京)은 도호부·목 등의 지방제도와 비교되는 최고의 행정단위였다. 그런데 이처럼 국가의 큰일이 전적으로 도참에 의지해 이뤄졌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여기에는 먼저 양주가 백제의 첫 도읍이 있었던 곳이라는 역사적 회고가 있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태조는 귀부해 온 후백제왕 견훤에게 전혀 연고가 없던 양주를 식읍으로 주었다. 후일 신라 경순왕에게 경주를 식읍으로 준 것과 비교된다. 또 한강 이북의 양주는 이남의 광주와 더불어 고려의 정치·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 효용성이 상당했다. 한강을 통한 조운은 바로 개경과 연결될 수 있었고, 그로 인한 경제력과 인구의 확장은 도시 규모의 확대로 나타났다. 자연스러운 사회문화적 인프라 구축과 함께 유명무실했던 동경을 대체할 수 있는 곳으로 양주가 주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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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성행행도팔첩병-시흥환어행렬도
#숙종의 남경 건설

그런데 남경은 10여년 뒤 양주로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1096년(숙종 1)에 건설에 대한 재논의가 김위제를 대표로 거론되었다. 이때 천문과 점성을 맡았던 일관(日官)들도 동의했으나, 다른 신료들은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그 조치는 즉시 이루어지지 못했다. 3년이 지난 1099년 9월에 재상과 일관 등에게 남경 건설에 대해 의논하라는 왕명이 내려져 본격화되었다. 앞서 네 종류의 도참서를 장황하게 인용하며 남경 건설을 강력하게 주장한 김위제의 요청은 국왕인 숙종의 의중을 적극 대변한 것이었다.

순종·선종과 함께 문종의 아들이었던 계림공 왕옹(王(엄숙할 옹))은 친조카인 헌종을 1년 반 만에 폐위시키고 1095년 10월에 즉위했다. 숙종이었다. 숙종은 헌종을 선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선종을 직접 이었다고 알리고, 쿠테타 직후의 국면 전환에 고심했다. 이런 점에서 남경 건설은 당연히 주목되었다. 김위제는 남경 건설의 배경으로 새 수도를 돌아보고 거기에 머물 때가 숙종이 즉위한 시점이며, 그곳이 현명한 임금이 성대한 덕정을 펼칠 땅이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풍수도참에서 남경은 왕업이 오래도록 발전하고 온 천하가 조회하러 모여들어 왕실이 창성할 실로 큰 명당이었다.

김위제가 남경 건설을 주청한 시기는 1096년 8월이었다. ‘도선답산가’에서는 그 시기와 장소를 “삼동(三冬)의 해 뜨는 곳”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에 대해 그는 “음력 11월에 해가 동남쪽에서 뜬다는 말, 즉 목멱산이 송경(松京, 개경)의 동남쪽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설명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김위제의 설명은 ‘도선기’와 어긋나는 해석이다. ‘도선기’를 따르자면, 11월에는 국왕이 중경인 개경에 머물러야 한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남경 건설을 주장하는 풍수도참서적들에서 참언 내용은 자료에 따라 조금씩 상이했기 때문이다.

숙종은 즉위와 동시에 추진하려던 남경 건설을 즉시 시행하지 못하고 3년 동안 지지부진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신료의 반대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이후 1099년 남경 건설의 재논의가 이루어진 것도 전적으로 왕명에 따른 것이었다. 그것은 숙종에게 절대 필요한 사항이었다. 자신이 직접 왕비와 원자(元子), 여러 신하와 의천 등을 거느리고 양주로 가서 도성 지을 곳을 살펴보았다. 도중에는 삼각산 승가굴에서 재계했다. 1101년(숙종 6) 9월에는 남경 건설을 위한 전담관청인 남경개창도감을 설치했다. 이때 문하시랑평장사 최사추, 지주사 윤관 등에게 남경에 가서 지세를 살피도록 했다. 그들은 풍수지리서에 의지하여 양주의 지형을 탐사했다. 그 결과는 삼각산 면악 남쪽의 산형과 수세가 이에 부합하니 주산 줄기의 중심이 되는 큰 맥에 북북서-남남동을 축으로 도읍을 세우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그런 결정이 있었음에도 관료들의 반대가 여전했으나, 대세는 이미 기울어졌다. 그리고 바로 남경 궁궐의 창건을 시작하며, 그 사실을 종묘·사직과 산천에 고하였다. 1104년 5월 드디어 남경 궁궐이 완성되었다. 즉위 후 십 년만이었다.

#남경의 범위와 운영

1102년 3월 남경이 넓게 설계되어 많은 민전(民田)을 침범할 것이라는 중서문하성의 지적이 있었다. 또 ‘경위령(京緯令)’의 설을 기초로 산과 강의 지형에 따라 도읍을 설계해야 한다는 건의도 있었다. ‘경위령’은 고려 건국을 예언한 도선이 그 법을 받았다는 당나라의 일행이 지은 것으로 전한다. 내용은 도성 건축과 관련한 풍수 관계의 자료로 짐작된다. ‘경위령’에 따라 구획한 남경의 범위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동쪽으로 대봉(낙산), 남쪽으로 사리(한강 연안), 서쪽으로 기봉(서대문 밖의 안현), 북쪽으로 면악(백악)까지이다. 남경의 동서는 낙산에서 모악까지, 남북은 한강에서 백악까지였다. 조선의 국도였던 한양보다 넓은 범위에서 조성되었다.

남경은 어떤 체제로 운영되었을까? 분명 개경과 비교하여 같은 규모와 시설이 설치되지 않았겠지만, 서경과는 거의 같은 규모에서 운영되었을 것이다. 우선 남경에는 숙종 때 건설된 궁궐과 성곽이 있었다. 이에 대한 자료가 남아 있지 못하지만, 남명문·북녕문 등의 존재가 확인된다. 또 태묘(太廟)도 건립되었다. 남경을 중심으로 한 별도의 경기제(京畿制)도 운영되었다. 여기에 속했던 군현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개경의 경기제가 인근 13개 군현이고, 서경의 경기제가 그곳을 아우른 6개 군현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서경과 비슷한 규모였을 것이다. 또 남경에는 분사(分司)의 관청과 관리가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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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성 남대문
#국왕의 남경 순행(巡幸)과 행렬

숙종의 남경 순행은 1104년(숙종 9) 7월 27일 단행되었다. 국왕의 지방 순행은 통치영역의 확인과 백성과의 직접 교감이라는 점에서 가장 적극적인 정치행위였다. 고려국왕들은 태조의 유훈을 받들어 서경을 중심으로 순행을 했다. 남경 건설 이후에는 순행 장소로 남경이 포함되었다. 숙종의 첫 번째 순행은 남경 완성을 직접 살피기 위해 7월말에 이루어졌다. 많은 신료의 반대를 무릅쓰고 즉위 직후부터 시작한 일을 매듭짓는 것이었다. 이때의 순행에는 남경 건설에 반대했던 신료들도 동행했다. ‘고려사’에는 이때 왕의 거둥과 관련한 행사가 “일관들이 건의한대로 진행되어 예제(禮制)에 맞지 않았으나 감히 말하지 못했다”고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숙종은 예성강변의 장원정에 들러 부왕 문종의 숙원이 이루어졌음을 아뢰었다. 이후 남경에는 예종 4차례, 인종 1차례, 의종 2차례의 순행이 있었다. 예종 때에도 남경 운영에 대한 신료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이에 술사(術士) 은원중은 도선의 설을 인용하여 김위제와 같은 주장으로 대응했다. 그 뒤에 예종의 후원이 있었음은 당연하다.

개경에서 남경까지 어가(御駕)는 평균 12일, 돌아오는 길은 8~9일정도가 걸렸다. 비교적 오랜 시일이 소요되었던 것은 국왕 행차에 많은 인원과 비용이 부담되었을 뿐 아니라 지나는 길목의 군현에서 일정한 통치행위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국왕은 남경에서 짧은 경우 17일, 길게 83일까지 머물렀다. 그 기간 동안에 국왕이 반야도량이라는 불사를 열고, 삼각산 승가굴과 장의사·문수사에 가서 재계하거나 태묘에 제사했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물론 이런 행위가 남경 순행의 일차적 목적은 아니었다. 하지만 승가굴의 방문은 왕위에 오르기 전 이곳에 숨어있었던 현종을 기리고, 그 후손으로서의 왕실 안녕과 정통성을 기원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고려사’에서는 국왕의 남경 순행에 대한 의례로 ‘서경과 남경을 순행하는 의장(儀仗)’ ‘서경과 남경을 순행했다가 돌아오는 어가를 맞이하는 의장’ ‘서경과 남경을 순행했다가 돌아오는 것을 맞이하는 행렬 장부’ ‘안찰사·별함 및 외관이 행차를 맞이하는 의례’ 등을 통해서 대략 알 수 있다. 국왕이 남경으로 갈 때에는 내시관·승제원·후전관·감찰어사 등 수행관료를 제외한 816명이 의장행렬에 참여했다. 교방악관 45명, 청악 5명, 취각군사 10명이 행렬 앞 좌우에, 취라군사 10명은 행차 뒤를 따랐다. 가는 도중에 국왕이 돈원(頓院)에 도착하면, 광주에서 안찰사가 의위와 악부를 갖추어 영접했다. 남경에 도착하면, 남경유수관이 예의를 갖춰 영접하고 양산·말·소 등을 바쳤다. 또 국왕은 도착한 날에 내시와 중방(重房)을 시켜 활을 쏘게 하여 과녁을 맞힌 자에게 비단을 하사하고 잔치를 벌였다. 남경에서 돌아올 때는 악관을 포함하여 1,989명이 참여했다. 교방악관 100명이 좌우로 서고 안국기(安國伎) 40명, 잡극기(雜劇伎) 160명이 각각 좌우로, 취각군사 10명은 행차 전면에, 취라군사 10명은 행차 뒤에서 각각 좌우에 배치되었다.

고려시대 국왕의 서경과 남경의 설치 및 순행은 황제국 체제의 다경제 국가로의 면모, 개경의 땅기운을 북돋기 위한 풍수도참의 영향, 국도와 지방을 이어주는 중간행정기구로서의 부도(副都) 운영으로 효율적인 국토 이용을 위한 조치, 왕권을 중심으로 한 정치세력의 동향 파악, 삼한 통합 마무리 등 여러 가지 요인들이 결합되어 진행되었다. 고려의 속악(俗樂) 중 하나인 ‘양주(楊州)’에서 양주는 토지와 물산, 인구 등이 다른 지역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고 읊어졌다.

그렇지만 거란과 몽고의 침입에서 개경이 함락되어 국왕이 피란했음에도 불구하고 서경과 남경은 부도로서의 역할을 거의 하지 못했다. 1234년(고종 21)에 어느 도참 승려는 아사달(아사달은 고조선의 두 번째 도읍이었다)로 비정되었던 옛 양주 땅에 궁궐을 조영하고 왕이 옮기면 국조(國祚)를 800년 연장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후 남경은 어느 정도 변화가 있었지만, 1308년(충렬왕 34) 한양부로 개편될 때까지 200년 이상 고려의 삼경제에서 한 축을 이루었다. 그리고 남경이 다시 주목되는 것은 14세기 중반 공민왕 이후 천도와 관련한 것이었고, 실제로 그것은 14세기 말 신진사대부들이 중심이 되어 건국한 조선의 등장으로 연결되었다.

김성환 경기도박물관 전시교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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