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천년, 고려시대의 경기문화] (37) 경기남부의 문화유적
④ 고려왕실 사찰

20151101010092.jpeg
▲ 태조 왕건상
봉은사와 왕건상(王建像)

서울의 국립고궁박물관과 개성의 고려박물관(개성 성균관)에서는 고려의 궁궐인 만월대 발굴유물 전시회를 공동개최중이다(서울 10월14일, 11월6일, 개성 10월15일, 11월15일). 2007년부터 개성 만월대에서 진행해오고 있는 최초의 남북공동 발굴조사에 대한 최초의 남북공동 전시회이다.

전시회에는 발굴과는 직접 관련이 없으나 만월대와 역사적으로 가장 관련 깊은 인물인 고려 태조 왕건상이 전시되고 있다. 실제 작품은 개성에서 볼 수 있겠고, 서울에서는 사진 이미지가 전시되고 있다. 동상은 1992년 고려 태조 무덤인 현릉(顯陵) 부근에서 옥으로 만든 화려한 허리띠 ‘옥대’, 각종 비단천 조각 등과 함께 출토됐으며 현재 북한의 국보급 문화재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실존 인물을 조각으로 재현한 작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데, 불교 조각품인 경남 합천 해인사의 희랑대사좌상(보물 제999호)을 제외하면 왕건상이 유일하다. 제왕상(帝王像)으로서는 동아시아에서도 유일한 예이다. 제왕의 모습을 조각품으로 제작했던 건 앞 시대의 왕과 왕비의 초상을 조각이나 그림 형태로 봉안하고 명복을 비는 고려 왕조의 전통 때문이었다.

태조 왕건의 진영이나 유상(遺像)은 개경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모셔졌으며 봉안 장소는 현재까지 대략 15곳이 파악됐다. 고려 제4대 왕인 광종(재위 949-975)이 아버지인 태조의 원찰(願刹)로 951년 창건한 개경의 봉은사는 대표적인 진전(眞殿) 사원이다. 고려의 왕들은 거의 매년 음력 6월 1일이나 2일에 봉은사에 행차하여 고려의 건국조(建國祖) 앞에 제사를 드렸다. 현재 개성 현릉의 정자각에는 왕건의 초상을 봉안하여 고려시대 진전사원에 모셔졌던 왕건의 진영에 대한 상상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Goryo_Taejo_Wangkun_2.jpg
▲ 태조왕건 초상화
현릉 곁에 묻힌 왕건상

현릉 출토 왕건상은 옷을 걸치지 않은 채 머리에 관을 쓰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몸 전체는 나신(裸身)으로 성기까지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으나, 원래 비단 옷을 걸쳤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함께 출토된 허리띠를 참고할 수 있는데 ‘고려사’에서는 무신집정자였던 최충헌이 봉은사의 태조진전에서 제사지낼 때 옷을 바쳤다는 기록도 등장한다.

왕건상이 착용한 관(冠)은 621년 당나라에서 법령으로 정한 24량(梁) 통천관으로 황제들이 착용하는 관이다. 대한제국기의 고종황제 어진에서 통천관을 볼 수 있는 이유이다. 광종은 즉위 원년인 950년 ‘황제’를 칭했고, 다음 해에는 개경을 황제의 서울이라는 뜻의 ‘황도(皇都)’로 칭했다. 왕건상은 10세기 혹은 늦어도 11세기에는 제작됐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광종대의 이러한 의식이 상(像)에 반영됐을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통천관을 쓴 이 상은 황제상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이는 불교에서 보살상이 머리에 착용한 관을 통해 그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점과 통한다.

현릉 출토 왕건상은 봉은사에 모셔졌던 상으로 보기도 하지만,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봉은사의 왕건상을 소상(塑像) 즉, 흙으로 제작한 상이었다고 적고 있다. 조선시대의 기록에는 쇠붙이를 부어 만든 왕건상(太祖鑄像)을 몇 곳에서 언급하고 있어 흥미롭다.

그중 ‘세종실록’에는 고려 태조의 진영(眞影)과 주상(鑄像) 그리고 공신들의 영정 등을 모두 개성으로 옮겨서 각 능(陵) 곁에 묻게 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진영, 소상, 주상 등을 무덤 곁에 묻었던 전통에 의거해서 본다면 현릉 부근에서 출토된 왕건상은 이 같은 기록에서 전하는 왕건 주상(鑄像)의 하나로 볼 수 있지 않을까.

20151101010172.jpeg
▲ 봉업사지는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 옛 죽산도호부 관아가 있던 지역에 남아있는 고려시대 절터로, 이 곳에는 현재 보물 435호로 지정된 죽산리 오층석탑과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태조 왕건의 진영(眞影)을 모셨던 사찰, 봉업사(奉業寺)

고려태조 왕건은 고려 전 기간에 걸쳐 진영, 유상과 함께 제사가 모셔졌는데, 이러한 고려왕실의 전통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경기 남부의 사찰이 죽주(현 안성) 봉업사이다. 봉업사에는 태조의 영정이 모셔져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사’에는 홍건적의 침입으로 안동까지 피난했던 공민왕이 1363년 봄에 개경으로 돌아오면서 “죽주에 머무르고 봉업사에 있는 태조의 영정에 참배했다”고 한다.

죽주는 현 안성시 죽산면 중심의 동부지역과 용인시 원삼면 등 남부지역을 일컫던 고려시대의 지명이다. 죽주에는 봉업사지의 오층석탑 외에 죽산리 삼층석탑, 매산리 오층석탑과 석불입상, 죽산리석탑과 석불입상, 장명사지 석탑과 석불대좌 등 고려 초기의 석탑과 불상이 밀집해 있다. 봉업사에 태조의 진영이 봉안되고, 죽주에 고려 초기 불교유적이 밀집하게 됐던 이유는 모두 죽주가 정치적으로 고려 왕실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지역이라는 점에서 찾아진다.

죽주는 지리적으로 기호지방과 삼남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충주를 거쳐 남양만의 당항성으로 갈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로였다. 이 때문에 신라가 한강유역에 진출한 6세기 이후 전략적으로 중요하게 됐고, 이미 통일신라 때부터 주목을 받고 있었다.

봉업사는 죽주의 호족인 죽산 박씨가 신라 말에 주도적으로 건립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후삼국시대에는 죽산 박씨 외에도 이곳을 중심으로 세력을 떨쳤던 농민군의 우두머리인 기훤(‘삼국사기’에서는 그를 ‘죽주적괴(竹州賊魁)’라고 기록했다)과 궁예, 그리고 왕건 등이 서로 관심을 가지고 그 운영에 관여하기도 했다. 창건부터 고려 전 기간에 걸쳐 봉업사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죽산 박씨는 고려의 건국에 참여했던 세력이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고려 태조는 수도를 철원에서 개경으로 옮긴 재위 2년(919)부터 후삼국을 통일하는 재위 19년(936년)까지 개경에 수십 곳의 사찰을 건립했다. 그러나 통일 이후에는 사찰을 창건했다는 기록이 더 이상 전하지 않기 때문에 태조는 통일 사업에 어떤 식으로든 불교의 힘에 의지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죽주 봉업사에 태조의 영정이 봉안됐던 이유는 여러 가지로 해석되지만, 이 지역이 왕건의 후삼국 통일과 관련 깊은 곳이라는 점에서 찾아지기도 한다.

봉업사지는 경기도박물관에 의해 시굴과 발굴이 이뤄졌는데 많은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됐다. 그 중 ‘화차사(華次寺)’, ‘능달(能達)’ 등의 명문을 통해 통일신라시대 봉업사의 전신이 화차사였으며, 고려 건국 직후‘태조 8년(925) 능달에 의해 중창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에서 능달은 왕건을 도와 후삼국통일에 적극 참여했던 청주 출신의 호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 초기의 봉업사 중창은 신라 말 기훤과 궁예의 세력 기반이었던 죽주의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 혹은 죽산 병합을 기념하고 이 지역 불교세력을 포상하기 위해 이뤄진 것으로 본다. 어느 쪽이든 태조의 의도를 배경으로 한 추정이다.

남한강변을 따라 형성된 고려의 불교문화

고려시대 경기남부의 불교문화는 남한강변을 따라 형성됐다. 강원도의 법천사지, 거돈사지, 흥법사지 등과 함께 경기도 남부의 여주 고달사와 신륵사가 있다. 남한강 지류를 따라가면 원향사지도 있다. 이 가운데 여주 고달사는 고려전기 왕실과의 관계에서 주목된다. 현재 고달사터에는 찬유(璨幽)의 것으로 전하는 석조승탑(石造僧塔)과 비(碑), 그리고 주인공을 알 수 없는 석조부도(石造浮屠) 등 고려 초기의 웅장한 조각적 기풍을 전하는 석조물들이 남아 있다.

고달사지에 전하는 ‘혜목산 고달선원 국사 원종대사비(慧目山高達禪院國師元宗大師之碑)’에는 원종대사 찬유가 “고려 태조의 청에 의해 광주(廣州) 천왕사(天王寺)에 주지로 있다가 혜목산 고달사로 옮겨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광주 천왕사는 왕건의 세력권 내에 있던 절로도 추정하는데, 찬유는 혜거·긍양 등과 함께 고려 광종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광종은 이들을 지원하면서 불교계를 재편하여 왕실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노력했던 왕이다.

천왕사는 고려 및 조선시대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고려사절요’에서는 공민왕 15년 4월에 “광주 천왕사의 불사리(佛舍利)를 왕륜사(王輪寺)에 안치했다’고 기록했고, ‘고려사’에서도 같은 기록을 신돈 열전에서 적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의 ‘세종실록’에서 ‘광주 천왕사의 사리 10과를 궐내에 바쳤다’고 전하고 있어 고려왕실에서 중히 여겨지던 천왕사의 불사리가 조선 전기의 왕실로도 이어졌던 것을 역사 기록이 보여주고 있다.

경기도 광주의 대표적인 불교유물 중에는 ‘광주철불’로 불리는 대형 불상이 있다. 신라 말 철불의 제작 전통을 계승한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이다. 1911년 하남시 하사창동의 절터에서 발견됐는데 인접한 한 폐사지 지표조사에서 ‘천왕(天王)’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이곳은 찬유가 머물렀던 광주 천왕사로, 광주철불은 천왕사에 봉안됐을 것으로 본다.

광주철불이 발견된 지역 일대에도 고려초기의 불교유적이 모여 있다. 명문 기와의 발견으로 고려 초기의 ‘광주동사(廣州桐寺)’로 추정하는 춘궁동 절터 일대에서는, 백제 토기편과 와편이 산재하여 백제의 절터로 추정되기도 하는데, 고려시대의 오층석탑(보물 제12호)과 삼층석탑(보물 제13호)이 전하고 있다. 교산동에는 또한 바위에 새겨진 마애약사불좌상이 전하는데, 977년(경종 2) 7월 29일 경종 황제의 만수무강을 빌기 위해 중수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광주철불이 고려 불상 가운데 가장 큰 규모라는 점과 함께 인근에 밀집한 불교유적은 불사(佛事)의 발원자 혹은 지원자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한다. 당시 이 지역의 불사를 정치·경제적으로 뒷받침할 만한 유력한 세력으로는 고려 초의 호족인 왕규(王規)를 거론할 수 있다.

왕규는 양근(楊根, 현재 양평)을 본관으로 했던 함규(咸規)로, 고려 태조에게서 왕씨 성을 받았다. 두 딸은 태조의 15, 16번째 비, 또 다른 딸은 혜종의 두 번째 비가 됐다. 이렇듯 왕실과 혼인관계로 맺어져 있었기 때문에 광주 지역에 대한 그의 지원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혜종 2년(945)의 역모로 일족이 모두 처형됐기 때문에 고려왕조에서 광주가 부상하고 그의 지원으로 불사가 일었던 시기는 이 이전까지로 본다.

심영신 홍익대학교 강사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