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경기천년, 경기 역사 문화의 전개]
1895년 '경기' 폐지 후 경기도 설치...480년간 한양과 道 연결하는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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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의 땅(根本之地)이란?

‘근본지(根本地)’ ‘근본지지(根本之地)’는 ‘뿌리가 되는 곳’ 또는 그렇게 여겨지는 곳을 가리킨다. ‘원래의 땅’ 혹은 ’본고장‘ 정도를 이르는 ‘본지(本地)’, 또는 ‘중요한 곳’을 보다 강조한 말이다. 그곳은 개인이나, 개인이 속한 집단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된다. 물론 그 집단의 성격과 규모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기도 한다. 개인에게는 고향 정도의 의미를 가질 수 있고, 성씨집단에게는 ‘본관지(本貫地)’ ‘관향지(貫鄕地)’를 가리킬 수 있다.

즉 사회적 집단에게는 오래전부터 그 집단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특정한 장소로 기억된다. 여기에는 역사성, 정치성, 사회성, 문화성, 기능성 등등의 요소가 함께 작용한다.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근본의 땅’이란 중요한 곳, 특히 정치성이 바탕이 되고 사회성, 문화성 등의 측면에서 “나라 전체를 지지하는 중요한 토대가 되는 곳”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려 사회에서 평양(서경)은 그곳에서 발생했던 묘청의 역모를 의식해 ‘반역지지(叛逆之地)’로 인식되기도 했지만, 대체로 고려 사직 500년동안 최대 길지(吉地, 명당)라는 것 때문에 특별한 중시하는 정책이 펼쳐졌다. 태조 왕건 이래 고려왕실 ‘근본의 땅(根本之地)’으로 여겨진 것이다. ‘고려사’를 편찬한 사신(史臣)은 태조가 여러 차례 서경에 행차해 그곳을 고려 근본의 땅으로 삼은 것을 거란의 침입으로 발해가 멸망해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의지로까지 해석했다. 한편 고려의 도읍이었던 개경 또한 고려의 ‘근본지’였다. 1361년(고려 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으로 11월 엄동설한에 국왕이 남쪽 안동으로 쫓겨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닥쳤다. 이때 15세의 이숭인(1347∼1392)은 곧 전쟁의 승리로 응당 국왕이 ‘근본의 땅’인 송도(松都, 개경)로 돌아올 것이라는 확연한 의지를 시로 읊조렸다.

두 자료의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서경과 관련한 ‘근본의 땅’이란 이해가 고려 왕실과 관련한 것이었다면, 개경과 관련한 그 이해는 고려 사직과 관련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모두 같은 뜻이다. ‘근본의 땅’이란 의미에는 밑바닥 깊숙하게 뿌리가 되는 곳이라는 인식이 스며있다. 이런 점에서 함경도 일대의 동북면(東北面)은 조선 왕업의 터전을 닦은 근본지였고, 서거정(1420~1488)이 ‘경기전(慶基殿)’이란 시에서 읊고 있듯이 조선 태조 이성계의 본향이었던 전주 또한 조선의 근본지였다.

더 나아가 ‘근본의 땅’이라는 말은 다양하게 사용됐다. 중종 때 영의정 윤은보 등은 곡창지대를 끼고 있는 경상·전라 양도를 ‘우리나라(我國) 근본의 땅(根本之地)’이라 해 산업적인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고, 명종 때 강화도는 군사적인 측면에서 근본의 땅으로 설명됐다. 다른 측면에서의 용례 역시 너무 많아 일일이 거론하기 어렵다.

‘경기(京畿)’와 관련해 ‘근본의 땅’이 처음 확인되는 것은 조선 건국 바로 직전인 1391년(공양왕 3년) 백성들에게 의무적으로 부담시키던 노역(勞役)의 징발에 대한 폐단을 조치하기 위해 염문사(廉問使)를 파견하는 기록에서이다. 이것은 직전에 있었던 과전법으로 토지제도를 개혁하면서 관리들을 대상으로 하던 과전(科田)과 각종 사전(私田)의 지급대상 토지를 경기제(京畿制)로 한정한 조치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이에 앞서 경기는 좌도와 우도로 편제됐다. 국왕이 펼치는 시정(施政)의 우선 대상지역이라는 뜻이 보다 구체화되는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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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좌·우도와 경기, 경기도


경기 좌·우도의 편제는 신왕조 개창을 위한 중요한 디딤돌 중에 하나였다. 이후 ‘경기제’는 좌·우도의 양도 체제로 1414년까지 24여 년 남짓 운용됐다. 아직 개성에 머물고 있을 때인 1392년 9월11일 태조 이성계는 경기좌도 좌간의대부 이문화와 경기우도의 삼사좌승인 이고에게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경기(京畿)는 왕실에 매우 가까우니 그 은덕을 선포하는 데는 마땅히 사방(四方)보다 먼저 해야 한다. 이에 그대들을 보내 백성들의 고통을 살피게 하니 나의 정치에 부합하게 하라. … 백성들에게 편리한 것들이 있으면 적당한 데 따라 거행해 나의 새로운 정치를 보필하게 하라.”

신왕조를 건국했지만 안정된 정국을 운용하지 못했던 건국세력에게 우선 필요한 것은 불안한 민심의 동요를 가라앉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왕실과 지근에 있는 경기 백성(京畿人)들에게 그 은덕이 우선 미치게 해 새로운 정치에 협력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경기를 ‘국가 근본의 땅’이라고 규정한 근본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1394년 한양으로의 정도(定都)는 이후 ‘경기’의 공간적인 범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국도(國都)의 위치가 남쪽 한양으로 내려와 ‘경기’의 규모와 범위가 보다 확대됐기 때문에, 대대적인 변동이 불가피했다.

신왕조의 건국과 한양에서의 새로운 도읍 건설은 단순히 국왕과 왕실이 남쪽으로 옮겨졌음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는 몇해전 국가의 행정기능을 세종시로 이전하고자 했을 때 십여년 넘게 사회적 논의와 진통을 겪었고, 이와 관련한 SOC 사업이 진행되고 있고 향후 십여년 이상 계속될 것이다. 고려 말 한양 천도 논의에 대해서는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조선의 한양건설은 어느 한 순간에 이뤄진 것이 아니었고, 그럴 수도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고려의 남경 운영으로 어느 정도 구축돼 있는 기반을 활용할 수 있었겠지만, 정치의 대상, 산업 체계, 문화 내용, 교통망 등 국가의 모든 시스템에 변화가 필요했다. 우선 경기우도에 속해있던 현재 황해도 일대의 배주·연안·강음·우봉·토산 등은 풍해도로 옮겨졌고, 충청도였던 여흥·음죽·양지·안성·양성과 강원도였던 가평 등을 경기좌도로 옮겼다.

그리고 4개월 후인 1414년(조선 태종 14년) 1월18일 관제(官制)를 개편하면서 경기 좌·우도를 고쳐 다만 ‘경기(京畿)’라고 해 현재의 공간과 지리적으로 비슷한 경기가 출발했다. 이것은 이후 조선왕실의 모든 기반을 지지하고 발전시키는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후 1895년 경기의 폐지와 1896년 경기도의 설치가 이뤄질 때까지 영역에서 약간의 변화가 있었지만, 480여년동안 경기는 광역지방행정단위인 도(道)에 속하지 않으면서 실제로 국도(國都)인 한양과 도(道)를 연결하며 배후에서 지지하는 ‘근본의 땅’으로서 그 역할을 했다. 경기는 왕화(王化)의 우선 지역이자, 성리학의 나라인 조선의 사대부문화가 만들어지고 다듬어지던 곳이었다.

국가 근본의 땅(國家根本之地), 경기(京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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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근본의 땅’으로서 경기는 왕의 교화(敎化)를 가장 먼저 시행하는 곳이라는 뜻이었다. 다른 지역의 ‘근본의 땅’이라는 의미와는 사뭇 다르다. 때문에 경기 백성들은 곤궁해서 안 됐다. 그러나 사정은 달랐다. ‘경기’ 곳곳에는 고위 관료의 별업(別業)이 많아 백성들에게 그 폐단은 빈번해졌다. 그리고 이를 시정하기 위한 조치들이 검토됐는데, ‘왕화가 가장 먼저 가장 많이 이뤄지는 곳’에서 실행된 제반 조치들은 그만큼의 시행착오도 거듭될 수밖에 없었고, 경기인들은 이를 감내해야만 했다. “경기는 바로 왕도(王都)에 딸린 지역으로 노동력을 징발하는 번거로움이 다른 도에 비교할 바 아니니 조세의 납부에서 모두 한 등급씩을 낮추도록 하자”는 세종 때 호조의 건의는 이런 사정을 보여준다.

‘경기’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경기인(京畿人), 기전인민(畿甸人民), 기내인(畿內人) 등으로 불렸다. 그들은 다른 도의 백성들보다 많은 조세와 부역을 담당해야 했다. 경기 일대의 왕릉 조성과 수리, 매년 이런 저런 왕의 행차에 따른 부담 때문이었다. 중국 사신이 오는 경우에 그 부담도 지어야 했다. 성종 때 대사헌이었던 이극돈(1435~1503)은 ‘경기인들의 부역(賦役)이 번거롭고 무거운데다가 자질구레한 일도 다른 도의 10배나 된다’고 했다. 거기에는 1446년(세종 28년) 토지세에 대한 보다 세밀한 차등 적용을 내용으로 하는 공법(貢法)의 시험적인 운용에서 드러나듯이 새로운 법의 실험적인 운용에서 나타나는 장단점의 수용 역시 경기인의 몫이었다. 대동법으로의 세제 개혁에 물꼬를 튼 이원익(1547∼1634)은 근본의 땅인 경기의 백성들은 특별히 굶주리지 않도록 휼민(恤民)해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자연재해나 잘못된 시정 운용으로 인한 경기인의 곤핍은 바로 조선왕실과 직결되는 문제로 인식됐다. “국고(國庫)가 부실한 이유는 경기의 토지제도가 제대로 운영되지 못한데 있다”고 인식됐다.

조선시대에 ‘경기’는 ‘나라의 근본이 되는 곳(國家根本之地)’으로 규정됐다. 경기는 다른 지역과 달리 ‘나라의 바탕, 뿌리, 근원’이라는 것이다. 조선 왕실과 사대부들의 인식이었다. 여기서의 국가는 왕실이 자리하고 있는 경도(京都, 한양)와 일정부분 통한다. 왕조 사회에서 왕실이 있는 경사(京師)는 국가 자체로 이해됐다. 즉 한양과 경기의 관계는 나무의 줄기와 뿌리의 관계였다. 한양을 나무·물에 비유한다면, 경기는 뿌리·샘과 같은 근원이었다. 1540년(중종 35년)에 국왕은 경기관찰사 임백령(?∼1546)에게 “나라에 경기가 있음은 나무에 뿌리가 있고 물에 샘이 있음과 같다. 경기의 정치가 잘되고 못됨은 나라 전체의 무게와 관계된다”고 하며 관찰사로서의 충실한 임무 수행을 다독였다. 유진동(1497∼1561), 조사석(1632∼1693), 이징명(1648∼1699), 서문유(1651∼1707), 이언강(1648∼1716) 등 경기관찰사들을 임용할 때마다 국왕은 교서를 내려 ‘경기가 국가 근본의 땅’임을 잊지 말도록 명했다. 왜냐하면 ‘경기’가 흐트러진다는 것은 곧 나라의 쇠멸을 의미했다. 새겨볼만한 말이다. 경기인을 교화시키려면 인화(人和)가 필수였다. 그래야 ‘국가 근본의 땅’으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기 천년을 앞두고 역시 새겨야 한다.

김성환 경기도박물관 전시교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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