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경기천년, 경기 역사 문화의 전개] (13) 경기도를 대표하는 성씨들-한양 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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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곡서원
조선왕조를 개창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부류를 사대부라 한다. 이들은 독서유생인 ‘사(士 : 章甫)’와 전현직 관료인 ‘대부(大夫 : 搢紳)’로 조정과 재야에서 정치·사회적 지배세력으로 성장했다. 사대부는 사족(士族) 또는 양반으로 불리며 고려말에 형성됐다. 그들은 대개 지방의 군현 향리층 가문에서 시작돼 경제적으로는 지방의 중소지주층에 기반을 뒀으며 고려 후기 정치적 혼란과 오랑캐와 왜구의 침입이 거듭되는 가운데 과거(科擧)·군공(軍功)·첨설직(添設職) 등을 통해 중앙의 관인이나 지방관이 된 부류들이다. ‘능문능리(能文能吏)’의 조건을 갖춘 새로운 관인으로 원나라로부터 전래된 신유학(新儒學 : 性理學)을 적극 수용하면서 숭유배불(崇儒排佛)과 반원친명책(反元親明策) 및 왕조교체의 주역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신흥사대부들 가운데에서도 한양조씨는 여말선초를 대표하는 명문가이다. 명문가의 조건은 첫째 도덕, 둘째 학문(文章), 셋째 누대로 높은 벼슬을 하는 것인데, 한양조씨는 이 3가지의 조건에 최고의 권력까지 겸비함으로써 조선조 최고의 명문가가 됐다. 현재 국내에 전하는 나라 조(趙)자를 사용하는 본관은 매우 많으나 풍양(豊壤), 한양(漢陽), 양주(楊州), 평양(平壤), 임천(林川), 배천(白川), 함안(咸安), 순창(淳昌), 횡성(橫城) 조씨 등이 대성이며, 그중 경기도를 기반으로 탄생한 조씨 성은 풍양(현재 남양주시 일원)과 한양(양주, 남양주 일원), 양주 조씨이다. 이들 조씨들은 모두 고려시대에 발생해 조선 건국에 공을 세우며 번창한 가문이었다.

한양은 현재의 양주 일원으로 고려 초에는 양주, 고려 중기에는 한양이라 부른 지역이었다. 문헌에 의하면 풍양조씨를 제외한 여타의 조씨는 중국에서 건너온 귀화성으로 개성에서 가까운 경기지역인 현재의 양주 일원에서 함께 성장하면서 풍양, 양주, 한양 등지를 본관으로 삼으며 분화한 것으로 보인다.

한양조씨의 선계는 고려 후기 첨의중서사를 역임한 조지수(趙之壽)가 시조이다. ‘조씨오천사년(趙氏五千史年)’에 의하면 조지수의 선대는 중국 전욱고양씨(?頊高陽氏 : 중국 고대 전설상의 제왕인 오제(五帝) 중의 한 사람으로 황제(黃帝)의 손자)로 송(宋)의 태조인 조광윤(趙匡胤)이 선조이며 그 후손인 조익(趙翼)의 둘째 아들로 중국에서 귀화했다고 전해진다. 조지수는 아들 형제를 뒀는데 둘째 조휘(趙暉)가 쌍성총관부 총관이 되고 이어 4대가 총관을 역임하면서 한양조씨 가문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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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라재
4대를 세습한 쌍성총관 가문


‘고려사’ 열전 조휘전에는 이들은 한성부 사람으로 후에 용진현(龍津縣)으로 이사했다고만 기록하고 있어 이들이 왜 용진현으로 이사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고려말 북방개척에 따라 정부의 주도하에 지방통치체제의 정립을 위해 대대적인 북방 이주가 있었던 사실이 있어, 이들도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북방으로 옮겨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용진현의 실상에서 뒷받침되는데, 용진현 등 북방 지역은 본래 고려 정부의 통치력이 강하게 미치지 못했고 고려의 유이민과 여진인들이 섞여 살고 있던 곳이었으며, 더해 몽골과의 전쟁으로 인해 더욱 지방 통치가 필요했던 곳이었다.

따라서 한양조씨는 북방의 용진현으로 이주한 뒤 이곳을 근거로 무장(武將) 실력을 바탕으로 성장했으며 몽골과의 전쟁이 한참이던 고려 고종년간에 조휘와 탁청(卓靑)이 고려에서 파견된 지방관을 죽이고 몽골에 항복하자 몽골은 이곳에 쌍성총관부를 세우고 조휘를 초대 총관으로 임명함으로써 고려말 한양조씨의 번성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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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흥부지도
이성계 가문과 중첩된 혼인관계


한양조씨는 조선 태조 이성계 가문과의 인연을 맺음으로써 더욱 번창하게 된다. 한양조씨가 자리를 잡은 덕원부(德原府)는 지금의 원산으로, 고려시대에는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 함흥·원산)가 있었던 곳이다. 쌍성총관부는 고려 후기에 몽골이 고려의 동북부 지방을 직접 통치하기 위해 설치했던 기구이다. 이곳은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李安社)가 간도로 들어가 원나라의 지방관이 되면서 기반을 닦기 시작한 곳으로 이안사의 현손인 이자춘(李子春)까지 4대에 걸쳐 원의 벼슬을 하면서 이 지역의 권력자가 됐고 훗날 아들인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개창할 수 있는 세력기반이 됐다. 즉 전주이씨가와 한양조씨가는 동북지방에서 모두 원의 지방관리로서 세력을 떨치던 가문으로서 당시 동북지방에서의 양가문의 연대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또한 조양기(趙良琪)의 딸이 이성계의 조부 이춘(李春)의 후부인(이자춘의 계모)이 되면서 양 가문이 혼인 관계를 맺게 되는데, 당시 전주이씨 가문의 이자춘도 천호(千戶) 벼슬이었는데, 원나라에서 고려 출신 이주민들에 대해 차별정책을 실시하자 원의 정책에 반기를 들고 고려를 돕기로 결심해 조양기의 아들인 용성부원군 조돈(趙暾)·조인벽(趙仁璧) 부자와 합세해 쌍성총관부를 회복했다. 이에 이자춘은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되고(후에 이성계가 계승), 조돈 부자는 예빈경과 태복경이 됐다. 또 조인벽의 첫 번째 부인이 죽자 이성계의 누이(이자춘의 딸, 정화공주)가 조인벽의 아내가 됨으로써 양 가문은 중첩된 혼인관계를 바탕으로 고려말의 혼탁한 정치 상황을 타개하고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는 동반자가 됐다.

조선 개국 초기 4공신 배출(개국공신-조영무·조인옥· 조온, 좌명공신-조연)

조지수의 장남은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조인재(趙麟才)이고, 차남은 쌍성총관을 지낸 조휘이다. 조인재의 손자 조세진(趙世珍)은 예의판서(禮義判書)를 지내고 한산백(漢山伯)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조영무(趙英茂)는 이방원을 도와 정몽주를 격살하는데 공을 세워 개국공신으로 정승을 지내고, 태종묘(太宗廟)에 배향됐다. 쌍성총관을 지낸 조휘의 아들 조양기는 총관 겸 부원수를 지냈으며 손자인 조돈은 아들 조인벽과 함께 홍건적을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조인벽은 사도도지휘사(四道都指揮使)와 삼사좌사(三司左使)를, 둘째인 조인경(趙仁瓊)은 검찬성(檢贊成)을, 셋째인 조인규(趙仁珪)는 검한성(檢漢城)을, 넷째인 조인옥(趙仁沃)은 개국공신으로 이조판서를 지내고 태조묘에 배향됐다. 조온(趙溫)은 위화도 회군에 참여한 공으로 개국공신으로 찬성사를, 조연(趙涓)은 제2차 왕자의 난때 태종을 도와 좌명공신에 우의정을, 조사(趙師)는 첨지중추원사를 지내는 등 조선 초기 4명의 공신을 배출하는 명문으로 성장했다.

조선 개국후 공신가로 승승장구하던 한양조씨는 단종복위 사건과 연결된 계유정난에 연루되면서 조영무의 손자 조완규(趙完珪)와 조완주(趙完珠) 형제를 비롯해 한 집안에서만 6명이 화를 입었다. 이로 인해 두 형제의 부인과 딸은 신숙주의 노비가 됐다가 자진해 죽고, 조종경(趙宗敬)·조이경(趙以敬)과 조인옥의 손자인 조순생(趙順生)과 그 아들, 손자들도 세조로부터 크게 화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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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광조 영정
조광조-동방사현(東方四賢)


조온의 손자인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한양조씨를 대표하는 인물로 조선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유학자이자 정치가였다. 조광조는 14세 때 유배 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했으며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의 영수가 됐다. 중종 때 사마시 장원하고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대사헌·동지성균관사를 역임했다. 유교로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며 왕도정치를 역설하고 향촌의 상부상조를 위해 여씨향약(呂氏鄕約)을 8도에 실시하고 미신타파를 내세워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했다. 또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해 소장학자를 요직에 안배하고 중종반정 정국공신의 위훈 삭제를 주장해 공신들의 4분의 3인 76명의 훈작을 삭탈했다. 이에 훈구파인 홍경주·남곤·심정 등이 경빈(敬嬪)박씨 등 후궁들을 움직여 무고하자 중종은 이들을 파직·투옥·유배시켰다. 이에 따라 조광조의 개혁정치 꿈은 꺾인 채 사사(賜死)되니 기묘사화이다. 그 후 선조 때 복권돼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율곡 이이는 조광조를 가리켜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이언적(李彦迪)과 함께 ‘동방사현(東方四賢)’이라고 지칭했다.

시조 조지수가 중국에서 귀화해 문신으로 조선에 정착했지만, 원 지배하에 동북지방으로 이주하면서 무인에 기반을 둔 총관이 됐고, 역시 무인계열의 전주이씨가와 결합하면서 조선왕조를 개창하고 다시 조선 왕조를 이끌어 가는 문신을 배출하는 문벌가로 거듭나게 됐다. 그 결과 한양조씨는 본관별 성씨에서 문묘 배향 1위, 종묘 배향 2위, 봉군 16위, 부조묘 7위, 시전 15위, 체식 21위, 청백리 2위, 문과 급제자 90여명을 배출하는 등 조선조 최고의 명문가였다.

장덕호 경기문화재단 뮤지엄본부 실학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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