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경기천년, 경기 역사 문화의 전개] (25) 초상으로 남은 임금… 고려·조선의 '어진'

우리 옛 그림 가운데 초상화가 점하는 비중은 국보와 보물 등 지정문화재 숫자를 통해서도 확인되듯 지대하다. 초상화는 우리나라 고대회화의 대명사가 된고구려 고분벽화 내 묘주 부부상이 말해주듯 늦어도 4세기 삼국시대부터 중세인 고려를 거쳐 근세인 조선왕조에 이르기까지 오래고 줄기차게 지속해 그려졌다. 옛 그림에서 산수와 화조와 더불어 큰 축을 이루는 인물화의 영역에서 초상은 단연 주류를 점한다. 이 점은 이 분야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40년 넘게 지금도 지속 중인 조선미 전 성균관대 교수의 일련의 연구에 힘입은 바 크다.

전쟁과 화재로 인해 전해진 작품은 극소수이나 고려시대 초상도 전하며, 특히 충효(忠孝)를 기저로 한 유교가 국시인 조선왕조는 성리학(性理學)의 도입과 함께 조상에 대한 존경으로 공신(功臣)과 향교 배향 등이 초상화 발전의 중요 요인으로 작용한다. 비록 어진과 여성초상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전래작은 드무나, 조선시대 초상화의 뛰어난 예술성은 국내만이 아닌, 같은 한자문화권은 물론 서구인(西歐人)들도 공감하는 일이다. 완성 전 초본(草本)인 ‘윤두서 자화상’(국보 제240호)과 70세 때 그린 ‘강세황 자화상’(보물 제590-1호)은 직업화가 아닌 문인화가로 조선선비들의 그림 솜씨를 대변한다.

한민족의 해맑은 심성과 올곧은 정신을 담고 있는 초상화는 기량(技倆)과 격조(格調) 모두에서 돋보이는 명품이며 걸작들이다. 한?중?일 동아시아 세 나라 초상을 비교하면 중국은 우리에게 소설로도 익숙한 삼국지의 주인공을 비롯해 여러 왕조에 걸친 제왕상이 다수 전한다. 이들은 눈썹이 치켜 올라가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 마치 짙은 분장을 한 경극배우(京劇俳優)인 양 과장이 심하며 도식적이다. 일본은 선묘가 부드럽고 장식적(裝飾的)이며 기백(氣魄)이 약하니 같은 한자문화권이나 세 나라의 구별되는 미감(美感)을 초상화에서도 보여준다. 종두법(種痘法)이 보급되기 이전에는 마마로 얽은 모습 그대로를 화면에 옮겨 과장이나 변형 없는 점에서 우선 차이를 보인다.

이들 조선시대 초상화가 오늘날 사진과 다름은 사실적 표현에 그침이 아니라, 인품과 학덕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주인공의 내면까지 전해주는(傳神) 점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우리 초상화의 역사는 사뭇 오래이다. 고구려 고분벽화 내의 묘주 초상을 비롯해 이미 본 연재를 통해 소개된 고려시대 ‘이제현상’(국보 제110호)과 ‘안향상’(국보 제111호), ‘염제신상’(보물 제1097호) 등이 있다.



임금 초상의 여러 명칭

- 조선후기 진경시대(眞景時代)에 어진(御眞)으로 통일

오늘날 왕의 초상은 일반적으로 어진(御眞)이라 부른다. 하지만 이같이 고정됨은 조선 제19대 왕 숙종 때에 이르러서이다. 그 이전은 문헌에 의할 때 진용(眞容)·진영(眞影)·진(眞)·영상(影像)·성용(聖容)·왕영(王影)·영자(影子)·영정(影幀)·수용(睟容)·어용(御容) 등 여러 이름으로 나타나 있다. 1713년에 이르러 숙종의 초상을 제작할 때 논의를 거쳐 일반적으로 초상을 사진(寫眞),왕의 초상을 모시는 곳을 진전(眞殿)이라 하니 어진이 타당하다고 의견이 모아졌고, 이에 이를 제작하기 위해 세워진 기관명칭도 어진도사도감(御眞圖寫都監)으로 불렀다. 어진제작에는 당대 일급화원들이 뽑혔고 이들은 어용화사로 지칭되니 화원으로 최고의 명예였다. ‘조선의 화선(畵仙)’ 김홍도(金弘道,1745-1806이후)가 어진 제작 후 그 공으로 고을 원님이 된 사실이 말해준다.

▲ 영조어진, 조석진·채용신(1900년), 비단에 채색 110.5x61.0cm, 보물 제932호, 국립고궁박물관

한국전쟁 때 부산 모처로 옮긴 조선왕조 어진들은 이곳에서 발생한 화재로 아쉽게도 대부분 불타 재로 변했다. 용케 화마(火魔)를 면한 것 중에 한 점이 1900년 조석진과 채용신이 다시 옮겨 그린 ‘영조어진’(보물 제932호)이다. 화면 왼쪽 일정 범위 불길이 접근해 그을린 흔적이 남아있다. 이 어진의 원화 즉 첫 그림은 1744년 영조의 재위 20년을 기해 그린 51세상이다. 어진을 통해 중국처럼 경극배우처럼 지나치게 꾸민 위엄이 아닌 푸근하면서도 형형한 눈매에서 총기와 더불어 자애롭고 어진 심성과 예지가 감지된다.

2007년은 조선왕조의 26대 고종이 일제에 의해 물러나 마지막 황제 순종에게 선양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고종어진’ 3점과, 최근 일괄로 보물 지정된 대원군 이하응 초상 5점(보물 제1499-1호) 등 운현궁에 간직된 종실 초상을 모은 2006년 2월 서울역사박물관의 ‘흥선대원군과 운현궁 사람들’(2007.2.27-4.15)전은 전주로 옮겨져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순회전(2007.7.3-7.29)이 열렸다. 진열실 도입부에 운현궁을 사진과 담장 재현 등 서울과는 다르게 연출했다. 출품작 중 고종황제 어진 3점은 국립고궁박물관·국립전주박물관·원광대박물관 소장품이니 2점이 전북에 간직되어 있고 2점이 칠곡과 정산 군수를 역임한 그리고 이 지역에서 활발하게 화업을 펼친 채용신(蔡龍臣 1850-1941)의 유작이다. 이들 초상들이 경기전에 모셔진 ‘태조어진’을 배안(拜顔)하려는 듯 조선왕조의 발상지 전주를 찾았으며 이후 보물 제931호였던 태조어진은 국보 제317호로 승급되었다.


▲ 태조어진, 조선(1872년), 1514년본 이모, 비단에 채색 146.5x79.0cm, 국보 제317호, 전주시 경기전

“호걸의 풍채, 봉우리 같은 콧날, 깊고 큰 지략, 제갈량 같은 용이네.

(風彩豪傑 華峰之準 智略深雄 南陽之龍)“

- 정몽주가 포은집(圃隱集) 내 이성계 초상에 지은 찬문에서



임금님 초상

- 왕과 황제

비록 후대의 이모본이며, 원본과는 거리가 크나 1794년 이명기(李命基·1756-1813이전)가 모사한 초상으로, 불화의 오방제위도와 유사한 경주 숭혜전의 ‘경순왕상’, 경기도 숭의전의 다소 조악한 ‘고려태조상’이 전한다. 북녘에서 1990년대 발굴된 왕건 조각상도 초상화에 대해 암시하는 바가 크다. 특히 고려왕조에서 들어 어진을 모시는 경영전(景靈殿)과 사찰에 별묘(別廟) 등을 설치하는 등 제도화된 진전제도로 도형공신을 제작해, 태조 때 37공신 12장군, 현종·정종·문종·고종 때 공신당(功臣堂) 및 여러 사찰에 안치했다. 문헌을 통해 궐내에 모신 원묘 외에 내전과 궐 밖 사찰 등에 어진을 모신 별묘와 능묘 근처의 원찰사찰에도 진전을 두어 34위에 이르는 어진과 비(妃)의 영정 등 상당량이 제작되었다.
▲ 공민왕 초상(사진), 크기 미상, 경기도 화장사 구장

고려시대 어진으로 비록 사진만이 전하나 경기도 화장사(華藏寺)에 있던 ‘공민왕어진’으로 전하는 것을 먼저 들게 된다. 비록 흑백도판을 통한 이해이나 낮은 복두에 정면상(正面像)의 공수 자세로, 배경에 병풍과 바닥에 채전이 깔려있고 등받이가 있고 손잡이가 여러 겹인 의자에 앉은 전형적인 제왕상이다. 최근 고려불화의 범주에서 도상학적으로 통하는 인물상들이 보여 비교검토를 요한다 하겠다.
▲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상, 조선시대(미상), 종이에 채색 73.8x56.4cm, 경기도박물관

마치 진한 부부애의 금슬(琴瑟)을 나타내듯 국립고궁박물관과 경기도박물관에 소장 중인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상’은 왕과 왕비를 함께 그린 병좌상이 전한다. 이는 후대 이모된 ‘박연 부부상’이나 ‘하연 부부상’ 및 원대 벽화로 남은 왕족 초상을 통해 일종의 국제적인 양상으로 사료된다. 이 두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상’을 비교하면 한 화면에 부부를 함께 등장시켰고, 서로를 향한 자세, 초상 앞에 기명(器皿)에 음식이 차려짐, 복식과 관식(冠飾) 등에서 유사성이 보인다. 그러나 이 두 폭에서 부부의 위치가 다르다. 고궁 것은 ‘박연 부부상’과 같이 향해서 볼 때 우측에 왕이 등장한 점, 한 쪽이 비단이며 종이인 점, 부부가 각기 휴대한 홀의 색 등에서 차이를 보인다. 고궁박물관 것이 크기가 크나 인물은 대체로 엇비슷한 규모라 하겠다.

조선 왕으로 1872년 박기준, 조중묵, 백은배 등이 이모한 전북 전주 경기전 소장 ‘태조어진’이 가장 시기가 올라간다. 대체로 구도와 구성 등 형식은 명 황제 초상을 따르고 있으되 용안을 비롯해 공수한 배까지는 원형을 이루며 용상은 방형으로 원(圓)과 방(方)의 조화까지를 읽게 한다. 형형한 눈의 정기, 두드러진 광대뼈에 큰 귀, 타고난 빼어난 모습에 헌칠하며 반듯한 무술로 단련된 몸매로 개국군주위로 위풍당당한 무인의 늠름함이 드러난다.

각기 화면의 좌우가 불에 탄 1714년 박동보(朴東普,1673-1744이후)가 그린 영조의 제위 오르기 전 잠저시절인 ‘연잉궁 초상’과 1816년 이한철, 조중묵 등에 의해 그려진 31세 군복본(軍服本) ‘철종어진’ 등이 전한다. 1900년 대한제국 때 조석진, 채용신이 이모한 ‘영조어진’은 1744년 장경주, 김두량(金斗樑,1696-1763) 등이 그린 51세상,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를 위해 세운 육상궁(毓祥宮) 냉천정(冷泉亭)에 안치하기 위한 반신상(半身像)이다. 조선임금 중 80넘은 장수에 52년에 걸친 제위에 있던 영조의 예리한 눈매에 노련하고 깐깐하며 다부진 성정을 반영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특히 대한제국 때 이모한 것이니 ‘영조황제어진’으로 명칭을 변경함이 옳다 하겠다.
▲ 고종어진, 채용신(20세기 초), 비단에 채색 118.5x68.8cm, 국립중앙박물관(이홍근 기증)

20세기 초 채용신이 그린 ‘고종어진’은 이홍근 옹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유물 중에 속해 있다. 전각 봉안용이 아닌 국왕에 대한 경모로 제작된 여러 벌 중의 하나로 사료된다. 김은호에 앞선 전통기법을 고수한 마지막 화사(畵師)로 채용신 초상화의 일반적인 특징을 두루 보여준다.

이원복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전 경기도박물관장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