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의 초상화 (37)공신과 사대부 초상

▲ '청백리의 표상' 황희 초상. 칭송받는 만큼 여려 본의 초상이 전해지고 있다. 왼쪽부터 상주박물관, 경기도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맑고 밝은 민족 심성-우리 초상화의 아름다움

2002년 봄 월드컵 한·일 공동주최에 따른 양국 문화재 교류전시 관련 공무출장으로 일본 도쿄에 들렸을 때다. 마침 도쿄예술대학교에서는 1897년부터 1954년까지 이 대학졸업생들의 졸업작품으로 남긴 자화상 특별전이 열려 뜻밖의 안복을 누릴 수 있었다. 1916년 그린 한국유학생 김관호(1890~1959년)의 자화상도 출품됐다. 김관호 자화상은 마치 조선시대 전통초상이 그러하듯 인물 배경을 옅은 회색의 무채색으로 처리해 일본인들과는 확연한 차이를 읽을 수 있었다. 김관호를 비롯해 고희동(1915년)·김찬영(1917년)·김용준(1931년)·길진섭(1932년) 등 이 학교 유학생 5명의 자화상은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중인 ‘미술 속 도시, 도시 속 미술(2016년10월5~11월13일)을 통해 국내에서 공개 중이다. 비록 캔버스에 유채이나 이들 그림을 통해서도 전통이 깃든 같은 양식임이 확인된다.

성리학을 조선성리학으로 심화하고 발전시킨 조선왕조는 단위 면적당 많은 책을 발간해 ‘책의 나라’로 지칭되며, 또 ‘초상화의 나라’로 불릴 만큼 초상화가 크게 발달했다.

이들 초상화가 지니는 의미는 기념과 기록적인 성격을 넘어 예술적인 완성도로 회화사에서 점하는 의의는 지대하다. 공예에서 고려청자와 조선백자의 보여주는 독자성과 민족적 미감에 뒤지지 않는 특징을 담고 있다. 고구려벽화에서 고려불화에 이어 조선의 채색화로 그 맥을 잇는 점도 주목되며 핍진한 사실적인 묘사와 더불어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성정(性情)과 인품(人品) 등 주인공의 내면까지 드러낸 점에서 과장과 권위적인 중국이나 장식적인 일본의 초상과는 구별된다.



공신(功臣)들-배향공신과 훈봉공신 외

우리나라 전통 초상화를 유형별로 분류할 때 왕의 초상인 어진(御眞)·일반사대부의 초상·공신상(功臣像)·기로도상(耆老圖像)·여인초상·스님들의 고승진영(高僧眞影) 등 대체로 6가지 범주로 나뉜다. 여성 초상은 묘주의 부부상으로 안악 3호분이나 덕흥리 고분 등 고구려벽화부터 그려졌다. 그러나 조선왕조에 이르러 왕비를 포함해 제작되지 않아 매우 드물다. 고승영정은 주로 사찰에서 불화를 담당한 화승인 금어(金魚)에 의해 제작됐다. 공신은 국가나 왕실을 위해 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던 칭호 또는 그 칭호를 받은 사람을 말한다.

공신은 배향공신(配享功臣)과 훈봉공신(勳封功臣) 및 훈호공신(勳號功臣)으로 나뉘며 훈봉공신은 정공신(正功臣)과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나뉜다. 붕어(임금이 세상을 떠남) 후 위패를 종묘에 모신 뒤 그 임금에게 특별한 공로가 있는 신하의 신주도 같이 모셨으니 이들이 배향공신이다. 이들의 후손들에겐 특전으로 자손이 죄를 지었을 때는 죄를 감해주었다. 당나라 때 처음 제도화돼 지속됐다.

고려 988년(성종 7년) 12월에 태조·혜종·정종·광종·경종의 5묘(廟)를 제정한 후 4년 뒤 국가의 사당을 완성했다.

태조실(太祖室)에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 등 오위를 배향한 것이 처음으로, 조선시대에도 왕을 위해 공을 세우거나 죽은 이를 배향했다. 태조 묘에 조선 개국공신 조준(趙浚) 등 7인을 시작으로 역대 왕의 공신 수를 엄격히 제한했으나, 고종 때 와서 추가로 배향된 수가 급격히 증가했다. 조선왕조에선 27왕 중 복위된 단종과 폐위된 연산군·광해군은 배향공신이 없고 고종·순종은 나라가 망해 세우지 못했다. 추봉된 왕까지 포함해 배향공신 수는 83위이다.

훈봉공신은 훈공을 나타내는 명칭으로 1등에서 3등 또는 4등까지 등급을 둬 포상했다. 이 또한 중국의 제도를 따른 것으로서, 신라 때 벌써 녹공 기록이 있으나 공신호(功臣號)를 내렸는지는 불분명하다. 왕건(王建)을 왕으로 추대한 홍유(洪儒)·신숭겸·배현경(裵玄慶)·복지겸(卜智謙) 등 고려 개국공신 1등을 포함해 3등으로 나눠 각각 공에 따라 상을 받았다. 940년(태조 23) 신흥사(神興寺)를 중수 후 공신당(功臣堂)을 둬 1등 공신 및 2등 공신의 화상( 그림 ‘화’ 像)을 벽에 그려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이라 불렀다

호종공신은 거란이 침입했을 때 현종을 호종한 강감찬(姜邯贊) 등에게 책봉한 것과 같은 성격으로 수종공신이나 시종공신 등으로도 불리니 수종공신은 1282년(충렬왕 8년) 이후 연행시종(燕行侍從)의 공이 있는 자를 책봉한 공신이다. 삼한공신은 광의로는 고려시대의 공신 모두를 포함하나 좁게는 고려 태조 때 공신만을 칭한다. 

조선시대는 1392년 조선 개국에 기여한 개국공신(開國功臣)을 시작으로 1728년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분무공신(奮武功臣)에 이르기까지 모두 28종에 달하는 공신이 있으니 이들에겐 교서와 녹권을 함께 줬다. 조선 초 개국·정사·좌명(佐命) 등 정공신에 한해 교서와 녹권을 함께 줬으나 정난공신 이후 교서만을 줬다.



공신상(功臣像)-‘신숙주 초상’ 외

고려와 조선 두 왕조 천년을 품은 경기도는 특히 조선시대 경화사족들의 세거지로 왕을 비롯해 명신들의 음택(陰宅)이 즐비하며 조선왕조 도자산업의 중심지인 분원이 있던 곳이다. 이에 경기도박물관의 소장품은 초상과 도자기, 그리고 중국 역대 복식과 이장 때 수습한 명가의 복식 등이 단연 돋보이며 박물관의 특징으로 사료된다.

특히 초상의 경우 ‘경기도박물관 명품선(2004년)’을 통해 살필 수 있듯 1506년 중종반정을 이룩한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 ‘유순정(柳順汀·1459-1512)초상’<도1>, 1604년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한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 ‘송언신(宋言愼,1542~1612년)초상’(보물 941호, <도2>), 1623년 인조 옹립한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 ‘이중로초상(李重老·1577~1624년)초상)’(보물 1174호) 등이 기탁 내지 소장품이다. 이 외에 역시 후대 이보본이나 여진족으로 귀화해 1392년 개국공신(開國功臣) 1등 ‘이지란(李之蘭·1331~1402년)’ 초상도 소장돼 있다. 

신숙주(申叔舟·1417~1475년)는 비록 경기도와 특별한 관련은 없으나 15세기 공신상이기에 소개한다. 세종부터 성종까지 6임금을 보필했고 단종을 폐하고 세조를 추대하는 등 사육신(死六臣)과는 다른 길을 택했다. 그 공에 의해 1455년(세조 원년) 좌익공신(佐翼功臣)으로 제작된 것으로 여겨지는 고령신씨 문중 소장 ‘신숙주초상’(보물 613호)<도3>은 조선 초기 전형적인 공신도상의 특징을 알려준다. 



조반과 그의 부인 초상-드문 부부 초상

조반(趙 클 ‘반’ ,1341~1401년)은 12세 때 부친을 따라 북경에 가서 한문과 몽골어를 배웠으며 18세에 연로한 부친과 귀국했다. 1382년(우왕 8년) 판도판서(版圖判書)로서 하정사 겸 주청사가 돼 명나라를 방문해 시호와 승습을 청했고 1385년에는 사은사(謝恩使)로, 1389년(공양왕 1년)에는 왕의 즉위를 알리려 명나라에 각각 다녀왔다. 조선건국 후 1392년에는 백관(百官)의 장문(狀文)을 가지고 조선 개국의 사실을 알리러 명에 다녀온 후 개국공신 2등에 책록 됐고 복흥군(復興君)에 봉해졌다. 1394년11월에는 이방원을 수행해 재차, 1396년과 1397년에도 하정사로서 명나라를 다녀오는 등 외교적인 면에서 활동이 두드러진 문신이다.

오늘까지 전해진 고려 말 조선 초 부부 초상은 대체로 두 가지 형식을 보인다. 이들은 하나같이 후대에 옮겨진 것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국립고궁박물관과 경기도박물관 소장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상’이나 ‘박연부부초상’처럼 한 폭에 부부를 함께 그린 예와, ‘하연부부초상’과 ‘조반 부부초상’<도4-1, 4-2>처럼 각 폭에 그려 나란히 모신 것 등 두 형식이다. 

‘조반 부부상’은 독립된 각 폭에 부부를 그린 대련의 예이다. 두 폭 모두 각 화면 밖 상단에 선명한 묵서(開國功臣勳二等封復興君知門下府事白川趙·之肖像, 開國功臣勳白川后人趙·之夫人肖像)로 주인공을 밝히고 있다.

후대에 개장된 장황이나 전통적인 방법을 따랐다. 의상부터 살피면 주인공들의 활동 시기가 아닌 옮겨 그렸을 때 복식이다. 선묘위주의 단순한 필선, 안면 묘사에서 음영과 요철이 전혀 보이질 않아 화풍은 초상의 이모(移模)가 늘 그러하듯 처음 양식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사료된다.



어진 재상 황희 초상-여러 번 반복해 그려진 청백리상 

“황희는 관대하고 후덕하며 침착하고 신중해 재상의 식견과 도량이 있었으며 후덕한 자질이 크고 훌륭하며 총명이 남보다 뛰어났다. 집을 다스림에는 검소하고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으며 일을 의논할 때는 큰 바름으로 정대해 큰 틀을 보존하기에 힘쓰고 번거롭고 가볍게 바꿈을 좋아하지 않았다.”

앞의 인용문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황희(黃喜·1363~1452년)에 대한 동시대를 산 이의 묘사이다. 황희는 조선 초 인물이나 명재상으로 방명(芳名)을 남긴, 조선왕조 500년간 지속해서 자주 회자됐다. 개성 가조리(可助里)에서 태어나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를 역임한 그는 명실상부한 경기도 인물이다. 본관이 장수(長水)이며 어릴 때 이름이 수로(壽老)인데 초명에 걸맞게 세수 90으로 장수를 누렸다. 너그럽고 어질며 침착했으며 사리가 깊고 청렴하며 충효가 지극했다. 학문에 힘써 높은 학덕을 쌓았으므로 태종에게서 공신은 아니지만 공신으로서 대우를 받았고 임금이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할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받은 명재상이었다.

그는 역사에 분명한 족적을 남겼으니 각 방면에 그의 손길이 느껴진다. 농사와 국방 및 민생은 물론 세종과 유학자간의 마찰을 조정하는 등 명망이 높았다. 그는 형조·예조·이조·병조의 정랑, 형조·병조·예조·호조·이조판서를 거쳐 삼정승 등을 두루 역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라한 집에서 궁핍한 생활 속 안빈낙도(安貧樂道) 로 청백리(淸白吏)의 표상으로 그의 이 같은 삶을 말하듯 초상이 여러 본 전한다.

옥동서원에 567년간 배향됐다가 2008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된 뒤, 얼마 전 원 소장처로 돌아간 초상은<도5-1> 반신상으로 고식을 지닌다. 이 초상은 1424년 주인공 62세 때 그린 원본 2점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다른 한 점은 경기도 파주 반구정에 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으로 전한다. 이와 매우 유사한 한 점이 경기도박물관에 있으며<도5-2>, 조선후기에 이모한 한 점이 국립중앙박물관(유물번호 덕수5524)<도5-3>과 서울역사박물관에도 있다. 이들을 비교하면 크기에서 조금 차이는 보이나 모두 한 본에서 연유함을 확인하게 된다.

이원복 문화재위원, 전 경기도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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