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건국과 경기제(京畿制)의 확대 (38)임진왜란과 한양 탈환 작전

▲ 한양도성

1592년 4월13일 왜군 1만8천700명은 병선 700여 척에 나눠타고 오전 8시 대마도 오우라항(大浦港)을 떠나 오후 5시 부산 앞바다에 도착했다.

다음날인 14일 왜군은 부산포로 상륙해 동래성을 함락시켰다. 4월18일 이후 후속부대가 도착해 육군 총 15만8천700명과 수군 등 지원병까지 포함해 약 20만 명의 왜군이 조선을 침략했다.

한양은 북쪽은 높은 산이 가로막고 남쪽은 한강이 흐르며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분지로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다. 내사산(북악산, 낙산, 목멱산, 인왕산)을 따라서는 유사시 외적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도성이 있었다. 한양도성은 태조 5년(1396년) 축조됐는데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에 이르는 큰 성이다. 조선 정부가 한양을 사수하기 위해 결사항전을 하려고 했다면 왜군이 한양을 쉽게 점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조선 개국 후 임진왜란까지 200여 년은 군사적으로 평화로운 시기가 계속됐다. 북방 여진족과 소규모의 전투는 있었지만 임진왜란과 같은 대규모 전쟁 경험은 없었다. 국방체제도 소규모 전투에 적합하게 정비됐다. 이에 조정은 왜군 대병력의 침입에 갈피를 잡지 못했다. 4월28일 신립의 패전 소식이 도착하자 대신들은 국왕의 피난을 논의했다. 사실 동원 가능한 중앙군은 국왕의 시위군이 전부였다. 한양을 방어할 병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버려진 한양 탈환위해 모인 근왕군

4월30일 국왕은 서둘러 한양을 떠났다. 왜군은 한양이 텅 빈 것을 확인하고 5월3일 한양도성으로 들어왔다. 그나마 혹시 복병이 숨어 있을까 재차 확인한 후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한양을 쉽게 포기했다는 것을 의심해 조선군의 매복 전술을 경계한 것이다. 왜군의 염려와 다르게 한양 방어의 목적으로 축조됐던 도성은 실제 전쟁이 발발하자 무용지물이었다.

조선의 상징인 한양도성이 별다른 저항 없이 함락된 것은 국왕과 지배층에게는 치욕 중의 치욕이었다. 왕권을 상징하는 궁궐과 종묘는 물론이고 도성 안의 많은 백성들을 스스로 왜군에게 내준 것이다. 이는 국왕과 지배층에게 통치자로서의 도덕성과 정치적 명분을 상실하게 했다. 전란을 수습하고 왜군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빠른 시간에 한양을 탈환할 필요가 있었다.

한양 함락 직후 바로 한양 탈환을 위한 시도가 있었다.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에서 모인 근왕군이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북상했다. 근왕군의 핵심 부대는 전라군이었다. 이를 지휘하는 전라관찰사 이광의 권한이 가장 컸다. 근왕군은 자칭 10만이라고 알려졌지만 행군 과정에서 탈영병이 속출했고 기록마다 달라서 정확하지 않다. 대부분 급하게 모집된 군사로 훈련이 거의 되지 않았다. 숫자만 많았지 전투력은 거의 없었다.

1592년 6월3일 근왕군은 오산 독산성에 주둔했다. 당시 한양 일대에는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지휘 아래 약 1천600명의 왜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6월5일 근왕군은 전라군을 현재 용인 구성으로 배치했다. 왜군들은 소규모 부대로 나눠 산속에 진을 치고 근왕군을 유인했다. 광주목사 권율은 용인을 우회해 직접 한양을 공격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광은 전 부사 백광언의 말을 듣고 용인 일대 왜군을 소탕하고 한양으로 진군하려고 했다. 백광언은 야간에 무리하게 문소산에 주둔한 왜군을 공격했다가 매복에 걸려 패했다. 근왕군의 사기는 꺾였다. 전투는 밤새도록 계속되고 왜군은 정면전을 피하고 산속에 숨었다. 근왕군은 지치고 졸려 잠시 쉬는 사이, 왜군이 기습했다. 전투 경험 없는 근왕군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허무하게 무너져 앞을 다퉈 후퇴하다 수많은 군사가 사망했다. 무능한 지휘관, 훈련되지 않은 군사, 무모한 작전 등이 결합돼 한양 탈환 작전은 실패했다.



전투 패배로 소극적 명군, 단독 한양 탈환 조선군

한양 탈환 불씨가 다시 살아나게 된 것은 평양성 승리 덕분이었다. 조명연합군에 패한 왜군은 속속 한양으로 집결했다. 명나라의 참전으로 전황이 불리해졌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의병 항전과 조선 수군이 바다를 장악해 보급에 어려움이 발생했다.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철수해 한양 주변 지역으로 철수한 왜군은 그 수가 6만 명에 달했다.

1593년 1월 경 조명연합군은 개성을 탈환했다. 곧 한양을 탈환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한양 탈환 작전은 명군의 이여송과 조선군의 권율이 주도했다. 조정은 명군에게 한양의 신속한 탈환을 요청했다. 하지만 평양성 승리에 도취되어 꾸물대던 명군은 왜군을 얕보고 섣부른 작전으로 한양 탈환의 기회를 날리게 됐다.

1593년 1월25일 명군의 부총병 사대수가 척후병을 이끌고 남하하여 구파발 일대에서 왜군 60여명과 싸워 승리했다. 중간에 한양에서 도망친 조선인을 심문해 왜군들이 한양에서 철수할 준비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대수는 이를 이여송에게 보고했다. 이여송은 정보의 진위 파악도 하지 않고 26일 개성에 주둔했던 병력을 이끌고 파주까지 남하했다. 27일에는 조선군의 반대에도 혜음령을 지나 벽제관(고양시 벽제동)을 거쳐서 여석령(고양시 오금동)까지 남하했다. 하지만 여석령에는 이미 이여송군의 이동을 감지한 왜군이 매복하고 있었다. 이여송은 왜군에 포위돼 겨우 살아나왔다. 왜군은 벽제관까지 명군을 추격하다 역공 당할까 두려워 다시 한양으로 철수했다. 벽제관전투 패배로 명군은 한양 탈환에 소극적으로 변했다. 조선군은 단독으로 한양을 탈환하기 위한 작전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율은 이미 한양 탈환을 위해서 다시 북상해, 1592년 12월 경 오산 독산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왜군과 수차의 전투에서 계속 승리했다. 벽제관 전투 후 명군이 후퇴하자, 1593년 2월 군사를 이끌고 한강을 도강해 행주산성으로 이동했다. 한양 탈환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행주산성은 삼국시대 토성이 있었으나 성벽은 거의 무너져 있었다. 조방장 조경은 여기에 이중의 목책을 두르고 진지를 구축했다.

조선군이 한양 턱 밑에 주둔하자 왜군은 2월12일 새벽 3만 명을 동원해 행주산성을 공격했다. 당시 권율 부대는 관군과 의병을 합쳐서 1만 명도 안 됐다. 왜군은 행주산성을 포위하고 정면 공격을 해왔다. 조선군은 화포와 화살 등 원거리 무기로 왜군을 제압했다. 하루 종일 전투가 치열했는데 적이 성안으로 진입하는 위기도 있었다. 화살이 다해 어려운 지경에 빠지기도 했지만 경기 수사 이빈과 충청 수사 정걸이 배로 화살을 싣고 와, 위기를 극복했다. 결국 왜군은 공격을 포기하고 무기와 군수 물자를 버린 채 한양으로 철수했다.

권율은 행주산성 승리 후 부대를 파주산성으로 이동시켰다. 파주산성은 현재 파주읍 봉서산에 있다. 삼국시대에 축조된 산성으로 행주산성에 비해 방어에 유리했다. 배후에 조명연합군의 지원을 받을 수 있고 한양탈환에 소극적인 명군을 압박하는 의미도 있었다.

한양은 행주대첩을 비롯해 곳곳에서 철수한 왜군이 몰려들면서 전보다 수비가 강화됐다. 왜군 지휘부도 조선의 왕도를 점령했다는 상징적 의미 때문에 순순히 한양을 포기하기 어려웠다. 남산 일대에 왜성을 쌓기도 했고 한강 주변에도 방어시설을 구축했다. 조명연합군 역시 한양 탈환 작전을 섣불리 실행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왜군이 한양에서 계속 버티기에 피해가 너무 막심했다. 조선군과 의병의 반격으로 개전 당시 병력이 절반 가까이 사망하고 무엇보다 군량이 부족했다. 바다길이 막혀서 육로로 힘겹게 보급을 받는 실정이었다. 부족한 물자를 조선 백성들에게 약탈해 유지하는 것도 한계에 이르렀다. 결국 왜군 총 사령관 우키다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한양에서 철수를 결정했다. 대신에 왜군 지휘부는 명과 협상을 벌이며 안전한 퇴로를 보장 받으려 했다. 명군도 왜군과 전투를 꺼려해 강화회담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조선은 왜군을 섬멸하고 싶었지만 명군이 지휘권을 가지고 있어 어쩔 수 없었다.

1593년 4월18일 한양의 왜군은 명 사신 심유경 및 조선 왕자 둘을 끌고 한양을 떠나기 시작했다. 조선 측에서는 퇴각하는 왜군을 공격하려고 했지만 명군은 반대했다. 파주산성에 주둔하고 있었던 권율은 왜군을 공격하기 위해 20일에 서둘러 한양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왜군은 이미 19일에 한양을 떠난 상태였고 20일에는 모두 안전히 한강을 건넜다. 한양은 왜군에 점령된 지 약 12개월 만에 무혈 수복됐다. 한양 탈환은 명군의 도움이 있었지만 그 주역들은 조선군과 의병들이었다.

서영일 한백문화재연구원장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