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의 경기문화-39.경기의 서원과 향교

▲ 팽성향교 명륜당
우리는 어릴 때부터 공부하란 얘기를 끊임없이 듣는다. 초·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국영수를 열심히 해야 했다. 국영수를 열심히 해 들어온 대학교에서는 4년 후 졸업 후 직장을 위한 취직공부를 또 열심히 해야 했다. 취직 후 공부를 안 해도 되나 싶은 그 순간부터 외국어교육, 직장교육, 평생교육 등 또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이렇다 보니 초중고 시절부터 정규교육 이외의 사설교육도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사실 교육은 ‘사회생활에 필요한 지식이나 기술 및 바람직한 인성과 체력을 갖도록 가르치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활동’이지만, 우리 시대의 교육이 과연 그러한가?

그렇다면 조선시대의 교육은 어땠을까. 지금처럼 정규교육과 사설교육, 심지어 “야간자율학습을 하지는 않았겠지?”라고 생각한다면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교육의 형태가 어땠는지 모두 알 수는 없지만 지금 못지않게, 오히려 더 꾸준히 공부를 했다. 희미한 촛불에 의지해 공자 왈 맹자 왈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넘기면서 읽는 모습을 보면서 흐뭇해하는 부모님의 모습은 사극드라마에서 너무나 익숙하다. 물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계층이 양반에 국한됐다는 점이 다르고 공부의 목적은 지금과는 조금 달랐다. 오히려 현대적인 개념의 교육이란 측면에 더 부합했을 것이다. 대학(大學) 8조목에 나오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당시 지식인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모습이며 이를 위해 끊임없이 공부를 했다.

집에서도 책상에 앉아 글을 읽고 쓰면서 스스로를 닦고 혼인을 해 집안의 가장이 돼서도 집안 대소사를 이끌고 과거에 합격해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는 것이야말로 대장부로서 가져야할 포부가 아니었겠는가. 여기서 바로 교육에서 출발하는 것이고 그래서 교육기관이 중요하다.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동네의 존경받는 어르신이 운영하는 서당(書堂), 국립학교인 향교(鄕校)나 사설학교인 서원(書院)이 있었다.

현재 경기도에는 26개의 향교(국립문화재연구소 2000년 조사)와 40개의 서원(경기도서원총람, 2006)이 운영되고 있다. 하나하나 모두 살펴볼 수는 없지만, 그 옛날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시작이었던 양주향교, 팽성향교, 심곡서원을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같은 듯 같지 않은, 향교와 서원

향교(鄕校)는 말 그대로 지방의 학교지만 국립교육기관이다. 고려시대부터 주요 지방에 건립하기 시작했는데 그 때는 향학(鄕學)으로 불렸다. 3경 12목을 중심으로 군현에 박사와 교수를 파견한 것이 시초이며 조선 건국 후에는 1읍(邑) 1교(校)의 원칙으로 전국 각지에 건립됐다. 특히 중앙의 성균관이 최고교육기관의 역할을 했고 향교는 지방의 중·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과 함께 공자 및 여러 성현을 제향(祭享)하는 기능이 있었다. 제향하는 인물은 공자를 비롯해 사성(四聖-안자, 증자, 자사, 맹자), 그리고 정호와 주희, 설총을 비롯한 우리나라 18위 등 모두 25위를 배향하고 있다.

교육과 제향이 이뤄지면서 공간적인 영역도 자연스럽게 강학(講學)공간과 제향공간으로 구성되고 배치방식에 따라 전학후묘(前學後廟), 전묘후학(前廟後學) 등으로 구분된다. 강학공간에는 강의가 이뤄지는 명륜당(明倫堂)과 학생들이 숙식할 수 있는 동·서재 등이 배치된다. 제향공간에는 사당인 대성전(大成殿)과 대성전에 배향하지 못한 성현들을 배향하는 동·서무가 배치된다.

향교와는 달리 서원은 조선 중기에 처음 설립됐다. 설립과 관련한 최초의 논의는 1418년(세종 1년) 세종실록에서 볼 수 있다. 국립학교인 향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다른 일에 동원되면서 학업을 그만두기도 해 이를 금지시키고 지역의 유학자로 서원을 설치해 학생들을 가르치면 포상한다고 한 것이다. 관학(官學)에서 해결할 수 없는 대안으로 사학(私學)적인 성격으로 나타난 서원은 분명 초기에는 교육적 기능이 강조됐다. 이후 1550년(명종 5년) 주세붕(周世鵬)이 설립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사액을 받으면서 국가에서 인정한 사학이 됐다. 백운동서원이 고려시대에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安珦)을 제향한 점을 고려해보면, 향교와 같이 교육적 기능과 더불어 선현에 대한 봉사기능이 더해져 내용상 향교와 크게 다를 바가 없게 됐다. 특히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 지방으로 낙향한 사림들이 주도가 돼 대원군의 서원철폐령(1864년) 이전까지 지역 유림들의 중요한 거점이 됐다.

강학공간과 제향공간으로 구성되고 배치방식에 따른 구분은 향교와 같다. 그러나 강학공간에서 강당의 이름이 별도로 있고 동·서재 대신 특별한 당호가 부여된다. 제향공간의 사당은 특별한 당호가 없으며 동·서무는 없지만 제향을 담당하는 전사청(典祀廳)등이 배치된다. 따라서 향교와 서원은 강학과 제향의 기능을 가진 점은 유사하지만 제향의 대상이 향교는 공자를 비롯해 성현들로 정해져 있지만 서원은 선현들 즉, 가문의 유학자나 스승을 모셨다. 반면 서원은 사설기관이기 때문에 향교에서 보이는 유사한 배치와 건물구성과는 달리 보다 자유로운 구성을 엿볼 수 있는 점이 다르다.

▲ 양주향교에서 진행 중인 우리옷 입기 교육.

양주향교와 팽성향교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호인 양주향교는 1401년(태종 1년)에 세워졌다고 하나, 원래의 위치는 알 수 없다. 아마도 1506년(중종 1년)에 불곡산(佛谷山) 부근에 관아가 건립되면서 향교 역시 지금이 위치에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소실됐다가, 1610년(광해군 2년)에 재건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다시 소실된 것을 1958년 유림들이 다시 복원했다. 현재 제향공간의 대성전과 동·서무는 복원됐으나, 강학공간은 명륜당만 복원됐다.

양주별산대놀이마당 오른쪽에 위치한 양주향교는 입구에 큰 보호수가 있고 바로 뒤에 외삼문이 있다. 이 외삼문을 들어서면 명륜당이 위치한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양 협실은 온돌방으로 꾸몄다. 명륜당 앞으로는 동·서재가 있었을만한 공간이 있지만 복원되지 않았다. 이 명륜당의 측면을 끼고 돌아서면 제향공간이 3개의 문과 담으로 구획됐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대성전과 위패를 봉안하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동·서무가 배치됐다.

역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호인 팽성향교는 1413년(태종 13년)에 창건돼 1445년(세종 27년)에 증설됐다. 병자호란으로 소실됐다가 1775년(영조 51년)에 중수됐다. 일제강점기에는 외삼문이 철거되기도 했지만, 1979년에 복원했다. 팽성객사가 있는 중심지에서 약 5㎞ 정도 떨어져 있으며 도로변 가까이 홍살문이 설치됐고 진입로 우측에는 유림회관이 있다. 외삼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강학공간이 펼쳐진다. 제일 앞에 명륜당이 위치하고 있다. 양주향교 명륜당과 마찬가지로 정면 5칸, 측면 2칸 건물이고 양 협실은 온돌방이다. 명륜당을 돌아서 들어가면 안마당이 나오며 좌우에 동·서재가 위치하고 중앙 계단 위에는 내삼문이 위치한다. 내삼문 안쪽은 제향공간으로 대성전만 위치하고 있다.


심곡서원 사우

조광조를 모시는 심곡서원

조광조(趙光祖)의 묘가 있는 용인에 위치한 심곡서원은 조선 중종 때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다 기묘사화로 희생을 당한 정암(靜庵) 조광조를 추모하기 위해 1650년(효종 1년)에 창건됐다. 이후 서원철폐령에도 철폐되지 않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1519년(중종 14년) 사림파는 중종반정의 공신 중 공이 없지만 공신이 된 자들을 제외하는 위훈삭제(僞勳削除)로 훈구파와 갈등이 생겼다. 이에 훈구파는 ‘주초위왕’(走肖爲王:走肖는 조광조의 趙씨의 파자)이라는 글자를 과일즙으로 나뭇잎에 발라 벌레가 파먹게 했다. 이것으로 공공연한 소문을 내고 왕이 보게 했다. 또한 사림파가 붕당을 지어 왕권을 위협하고 국정을 어지럽힌다고 해, 결국 중종이 사림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한 일이 바로 기묘사화이다. 당시 사림의 지도자였던 조광조는 귀양 가서 사약을 마시고 죽었으며 많은 사림들이 유배, 파직을 당하고 일부 사형을 당하기도 했다.

심곡서원은 광교산과 형제봉에서 이어지는 마을 뒤 경사지에 위치해 서향을 하고 있다. 원래는 전망이 좋았을 것이지만 아파트로 둘러싸여 현재는 사방이 많이 막혀있게 됐다.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을 들어서면 새로 복원하기는 했지만, 동·서재의 역할을 하는 거인재(居仁齋)와 유의재(遊義齋)가 있다. 인(仁)이 머물고 의(義)가 노니는 공간이다. 이 두 건물 중앙에 강당인 일소당(日昭堂)이 있다. ‘日昭’에는 조광조가 죽기 전에 남긴 시의 구절 중 ‘昭昭照丹衷’(소소종단충)에서 따왔다고 한다. 일소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 건물로 보통 강당에 있는 온돌방이 없다. 강당 뒤편 오른쪽으로는 장서각이 있고 왼쪽에는 고직사 겸 관리사가 있었는데, 현재는 발굴조사 중에 있다. 그 사이 중앙으로는 내삼문이 있고 뒤편으로 사당이 있다. 사당 내부에는 조광조의 위패가 중앙에 모셔졌고 좌측에는 양팽손(梁彭孫)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조광조를 모심은 당연하지만 양팽손은 왜 모셔져 있을까? 양팽손은 조광조와 같은 해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면서 중앙정계에 진출했고 기묘사화로 파직당해 화순으로 내려왔다. 능주에서 조광조가 사약을 마시고 죽자 그의 시신을 수습하고 자신의 마을 근처에 가묘를 만들었다가 이듬해 용인으로 이장을 한 장본인이다. 왕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죽은 자를 수습한 그 절개와 의리는 지금 조광조 옆에서 넋을 위로받기에 충분하다.



새로운 교육의 대안, 향교와 서원

지금의 향교와 서원이 조선시대처럼 국립교육기관이거나 지역 유지들의 주요 거점은 아니지만 새로운 교육들이 조금씩 시작되고 있다. 양주향교에서는 초등학생들이 우리 옷 입기 교육이 진행되고 있었고 심곡서원에서는 ‘인문학브런치’라는 이름으로 ‘재미있는 한국사’ 강의가 이뤄지고 있었다. 또한 다른 향교나 서원에서도 이와 유사한 교육이 이뤄지고 있어 어린이부터 어른들까지 누구나 선현들이 공부하던 공간에서 공부를 해 볼 수 있다.

온고지신(溫故知新) 사자성어처럼 옛 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아는 것이 꼭 지금의 교육기관에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시간을 내어 우리 옛 교육공간에서 우리의 문화와 예절, 사상과 정신을 배울 수 있다면 그 또한 옛 선학들의 바람으로 생각되면서 지금 향교와 서원이 이 시대에 필요한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탁경백 국립문화재연구소 건축문화재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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