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만한 산세에 수맥 둘러… 학문하기 좋은 땅

오산시 궐동 147에는 궐리사(闕里祠)라는 공자 사당이 있다. 궐리는 본래 공자가 자랐던 노나라 곡부(曲阜)의 마을 이름이다. 지금은 중국 산둥성 태안시 취푸(곡부) 현의 궐리를 말한다. 궐리사를 절로 혼동하는데 사당이다. 궐리사는 공자의 영정을 모신 사당을 말한다. 우리나라에는 논산 노성면과 오산 궐동 두 곳에 있다. 노성 권리사는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의 제자들이 세웠다. 반면에 오산 권리사는 공자의 후손들이 건립했다.

공 씨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처음 살게 된 것은 고려 충정왕 3년(1351)이다. 공자의 53대손인 공소(孔紹)가 원나라의 한림학사로 공민왕과 결혼한 노국대장공주를 따라 고려에 왔다가 귀화하면서부터다. 처음에 정착했던 곳이 지금의 오산이다. 공자의 가르침인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은 공자 후손들에 대해 많은 배려를 했다. 태조는 “공자의 가르침이 아닌 것이 없으니 그 자손은 성예(聖裔)로서 은전을 받아야 한다”는 전교를 내렸다. 이후 왕들도 관직에 등용하고 사소한 죄는 형벌을 면하게 했으며 잡역을 시키지 않았다.


오산 궐리사에 얽힌 전설이 있다. 공자의 64세손인 공서린(孔瑞麟·1483-1541)이 있다. 그는 조선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해 경기·황해 양도 관찰사와 대사헌을 역임한 인물이다. 기묘사화에 연루돼 옥고를 치른 뒤 낙향해 제자들을 가르쳤다. 뜰 안 은행나무에 북을 달아놓고 공부를 독려했다. 그가 죽자 은행나무도 말라죽었다. 그 뒤 세월이 흘러 정조가 융릉에 참배 왔다가 남쪽을 바라보니 많은 새들이 슬피 울며 모여드는 곳이 있었다. 괴이하게 여겨 그곳을 가보니 죽었던 은행나무에 싹이 트고 있었다. 내막을 알게 된 정조는 이곳을 공자가 살았던 마을 이름을 따라 궐리로 바꾸게 했다. 그리고 사당을 세우고 ‘권리사’라는 친필 편액을 하사했다. 또한 공 씨(孔氏)들에게는 곡부(曲阜)라는 본관을 쓰도록 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성묘(聖廟)로 향하는 계단이 나온다. 그 양쪽으로는 측백나무가 심어져 있다. 공자의 고향인 곡부의 공묘(孔廟)에도 수만 그루의 측백나무가 있는데 이를 상징한 것이다. 성묘 건물에는 공자의 영정이 보관돼 있고 마당에는 수백 년이 됐음직한 향나무가 서 있다. 중국 공묘 마당에도 향나무가 있다. 제를 올릴 때 향나무를 재료로 향을 만들어 피우기 위해서다. 동편에는 행단(杏亶)이란 2층 건물이 있다. 중국 공묘 대성전 앞에 있는 행단과 비슷한 모양이다. 행단이란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서 삼천 제자들을 가르친 데서 유래한 말이다. 현재 중국 공묘에는 은행나무가 없다.

오산은 오산천을 사이에 두고 산세가 갈린다. 동쪽은 용인 부아산(404m)에서 내려왔고 서쪽은 수원 소실봉(186m)에서 내려왔다. 궐리사는 서쪽 편에 있다. 이곳 주산은 석산(135.2m)이다. 한남정맥 소실봉에서 경희대학교 뒤편의 청명산(190m)과 신갈저수지 서쪽의 매미산(154m), 유엔군 초전 참전비가 있는 반월산(113m)과 여계산(158.6m)을 거쳐 왔다. 오산의 산세가 대부분 그러하듯 석산도 순하다. 산세가 순하면 물의 흐름이 순한 법이다. 이러한 곳에서 비옥한 땅이 생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산이 높지 않아도 수려하고, 물이 크지 않아도 맑으면 영묘한 기운이 모인다”고 했으니 오산이 바로 그런 곳이다.

석산에서 동쪽으로 갈라진 산맥은 물향기 수목원 뒷산(69m)을 만들고 현무봉으로 궐동의 78.6m 봉우리를 세웠다. 그리고 여러 형태의 변화를 더 한 다음 궐리사로 이어져 왔다. 맥을 받는 곳에 공자의 영정을 모신 성묘가 있다. 내삼문에서 외삼문까지 내려오는 계단은 혈장을 아래에서 받쳐주는 하수사다. 외삼문 앞에는 궐리사로가 있다. 풍수에서는 도로를 물로 본다. 그 이유는 본래 하천을 복개해 도로를 만든 경우가 많아서다. 실제로 비가 오면 빗물은 도로를 따라 흐른다. 도로가 궐리사 전체를 감싸고 있으니 길한 형상이다.

좌청룡에는 필봉산(144m)이 보인다. 오산 사람들은 필봉산을 매우 사랑한다. 새벽마다 운동을 하고 주말이면 가족들이 산책하는 산이다. 정조가 융릉을 참배했을 때 앞을 바라보니 산의 모양이 붓끝처럼 생겼다해 붙여준 이름이다. 필봉은 학문을 상징한다. 우백호는 현무에서 갈라져 나온 능선으로 앞의 안산까지 이어졌다. 안산에는 오산대학교가 입지하고 있다. 이곳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학문의 땅으로 적합한 모양이다. 오산시가 교육도시로 이름 높은 것도 이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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