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시 상록구 용하공원로 39 “고향마을 아파트”. 일제의 강제징용으로 사할린에 끌려갔던 우리동포 중 479세대 628분이 귀국해서 살고 계신다. 이 아파트 한켠에 세워진 흉상의 주인공 박노학 선생. 기초생활보장수급권자로 난방비가 아까워 겨울에도 불기 없는 냉방에서 지내기 일쑤인 사할린 귀국동포들이 한푼 두푼 모아 건립한 흉상이다. 도대체 박노학 선생이 누구길래 어려운 형편의 동포들이 뜻을 모아 흉상을 건립한 것일까? 선생의 일대기에 역사의 아픔을 치유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사회의 민낯이 응축되어 있다.


해방후 정부는 사할린 한인 귀환 문제에 무관심

고 박노학 선생은 1958년부터 돌아가신 해인 1988년까지, 역사에서 잊혀져가고 있던 사할린 한인의 존재를 알리고 이산가족 상봉과 영주 귀국에 헌신하신 분이다.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자 사할린은 소련 영토로 편입된다. 이때 일본은 원래 일본 출신의 자국민은 모두 송환했지만 당시 나라를 잃어 일본 국적이 되었던 한인들은 일본으로 송환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그렇다 치고, 우리 정부는 어떠했는가? 조국으로의 귀환을 꿈꾸며 긴 고통을 참아왔던 한인들을, 해방된 조국의 그 누구도 관심 갖지 않았고, 사할린 한인들은 소련 영토에 버려진 채 신산한 고통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많은 수의 한인들은 소련 국적을 선택하는 경우 한국으로의 복귀에 걸림돌이 될 것을 염려하여 소련 국적을 선택하지 않고 상당기간 무국적 상태로 남게 된다. 국적이 없을 경우 소련 공산당에 가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대학은 물론 직업학교에도 입학할 수 없고 연금, 장애급여 등의 혜택도 받을 수 없어 여러모로 불리했지만 대부분의 한인들은 그런 불리함을 감수하고서도 조국으로의 귀환을 꿈꾸어 왔던 것이다.



소련-일본-한국간 3각 편지를 연결해

행인지 불행인지 박노학 선생은 일본인 여성과 결혼한 덕분에 1956년 사할린을 떠나 일본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일본에 정착한 선생은 1958년 “사할린억류귀환 한국인회”를 만들고 사할린 한인들이 귀국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하는 탄원서를 당시 이승만 대통령 앞으로 보냈다. 선생의 필생의 업적은 소련-일본-한국을 연결하는 일종의 “사설우체국 역할”이었다. 당시 한국은 소련과 미수교국이어서 편지를 부칠 수 없었던 반면, 일본은 소련 및 한국과 편지왕래가 가능했다. 선생은 일본에 거주했기 때문에 사할린 거주 한인들의 편지를 받을 수 있었고, 사재를 털어 이를 다시 한국 각지에 사는 가족들에게 부쳐주는 역할을 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작성한 7천여 사할린 한인들의 성명과 주소가 이후 사할린동포 귀환운동의 결정적인 자료가 된다.



우리나라 어디도 모시려하지 않아

안산 고향마을은 우리 정부가 아니라 일본 정부가 낸 돈으로 건립된 곳이다. 일본 정부가 주택건설자금을 지원하고 한국정부는 아파트 건설부지를 제공하기로 했는데, 일본의 지원금은 곧바로 도착했지만 우리나라 어느 도시도 사할린 한인을 받겠다는 곳이 없어 무라야마 담화 이후 3년여 시간을 허송하게 된다. 그러다가 어렵사리 안산시가 수락하면서 1999년말에 이르러서야 고향마을이 조성되었다. 일본은 거금을 내는데, 우리가 받을 곳이 없어 시간을 보내야 했던 현실, 이게 우리가 지켜주지 못해 강제징용당한 핏줄을 대하는 우리 민낯이었던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정부에서 영주귀국할 수 있는 한인의 범위를 1945.8.15일 당시 사할린에 거주하던 한인으로 한정한 것이다. 즉, 1945.8.15일 이후 태어난 한인 2,3,4세에게는 조국으로 돌아올 기회가 원천봉쇄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사할린 한인 1세들은 징용되던 때에 이어 다시한번 가족들과 생이별하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국제법상의 기민(棄民)에 해당돼

국제법상 “기민(棄民)”이라는 개념이 있다. 자국민을 보호하지 않고 버리는 행위로, 국가라면 해서도 안되고 할 수도 없는 행위를 말한다. 우리 정부가 해방이후 사할린동포의 귀환조치를 취하지 않고, 어느 도시도 그들을 안으려 하지 않고, 한인 1세에만 한정하여 받아들인 일련의 정책은 국제법상의 기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같은 안산시의 뗏골마을에는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고려인들의 후손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다. 두 마을분들 모두 우리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우리 핏줄이지만, 너무도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지금이라도 이분들과 그 후손들을 범죄자만 아니라면 조건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국민을 지키지 못한 국가가 해야 하는 도덕적 마지노선이다.



박수영 아주대 초빙교수/전 경기도 행정1부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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