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의 전략 요충인 풍도와 팔미도는 동북아 국제관계와 한반도의 현실이 투영된 역사현장이다. 구한말 청일전쟁(1894-95년)과 러일전쟁(1904-05년)의 서전(緖戰)이 두 섬에서 전개되었다. 일본이 기습 도발한 두 차례의 전쟁은 구한말 우리 역사에 긴 암운을 드리웠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관계는 12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얼마나 달라졌을까. 국제관계에서 한반도의 위상은 구한말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격상했다. 중국과 일본의 힘의 균형도 이전과는 달리 역전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분단된 한반도의 지전략적 입지와 선택의 폭은 여전히 좁고 가변적이다. 강대국의 상충하는 이해관계에 둘러싸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한국의 현실은 구한말의 역사가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근현대사에서 도발한 수차례의 전쟁에서 그러했듯이, 일본은 청과의 전쟁에서 선전포고 전에 기습전으로 전쟁을 시작했다. 경복궁 점령사건이 그것이다. 동학군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이미 서울에 입성하여 용산에 캠프를 차린 일본군은 1894년 7월 23일 새벽 4시경 경복궁 남문으로 진입하여 궁을 점령하고 국왕을 감금했다. 이는 일본 정부와 군부, 주한 일본 공사관이 수개월 전부터 계획한 작전이었다.
영국과 미국의 자본을 끌어 들여 청과의 전쟁에 총력전을 벌였던 일본은, 승전 이후 본격적인 제국주의 길로 들어섰다. 청일 시모노세키 강화조약 제1조를 통해 일본은 청국이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도록 만들었다. 청과 일본이 함께 ‘조선의 독립’을 인정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청국의 종주권 폐기를 공식화함으로써 한반도를 독점하겠다는 승전국 일본의 일방적 선언이었다. 그 점에서 시모노세키 강화조약은 조선을 일본과 같은 ‘자주국’이라고 규정하며 청의 종주권을 부정했던 1876년 강화도 조약의 완결판이다.
전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패권 및 타이완, 랴오뚱반도, 팽호열도(오늘날 다오위다이 분쟁지역이 속해 있는)와 같은 청국 영토를 차지했다. 일본의 승리는 한반도와 동북아 국제관계에 즉각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시베리아철도를 부설하며, 동시에 하얼빈에서 랴오뚱반도의 뤼순 다렌까지 시베리아철도의 지선인 동청철도(오늘날 중동철도)를 부설하려던 러시아로서는 일본의 라오뚱반도 획득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결국 러시아는 프랑스, 독일과 함께 이른바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청과의 전쟁에서 획득한 랴오뚱반도를 청에 반환케 만들었다.
당시 국제관계에 대한 탁월한 정치감각을 보유한 조선의 민왕후가 승전국 일본보다 더 강력해 보이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할 수 있다고 본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런 민왕후를 일본이 시해한 것은, 당시 청에 대한 배상금 제공문제를 둘러싼 삼국간섭의 국제공조가 와해됨으로써 자국에 유리한 국제환경이 조성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민왕후 시해는 갓 부임한 미우라 고로 주한공사와 낭인들이 우발적으로 자행한 범죄가 아니다. 조선문제에 관한 전결권을 가지고 청일전쟁 중에 자청해서 부임한 이노우에 가오루 주한공사와, 이토 히로부미 수상, 무츠 무네미쓰 외상 등 일본정계의 거물급들이 공모한, 일본정부의 국가범죄였다. 민왕후 시해는 일본의 도발적 침략 행보의 뒤에 반드시 유리한 일본에 국제환경이 전제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재삼 확인해준 사례이다.
민왕후가 시해된 이후,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1년 여 동안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이노우에 전임공사와 미우라 신임공사가 주한공사관에 17일간 함께 머물며 왕후시해를 모의했듯이, 아관파천 역시 새로 부임한 스페이르 신임 러시아공사와 전임 웨베르공사가 공모한 일이었다. 민왕후 시해의 주범들이 히로시마 재판에서 무죄방면된 것처럼, 러시아정부 역시 아관파천을 야기한 두 공사를 사후문책한 사실이 없다. 민왕후 시해사건과 아관파천은 같은 맥락의 그야말로 총성없는 러일전쟁이었다.
구한말 철도부설권과 광산 및 각종 이권 등이 아관파천기에 러시아공사관을 통해 열강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1898년 초 러시아는 한러은행을 설립하며 한반도에 경제적 진출을 극대화했다. 이후 러시아는 만주에 보다 집중하기 위해 일본에 한반도에서의 상공업상의 우위를 인정해주었지만, 한반도에서의 정치적 우위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와 랴오뚱반도의 뤼순 다렌에 분산배치한 태평양함대의 대한해협의 자유 항행권도 포기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일본군대가 한반도에 상륙하는 것도 좌시할 수 없었다. 러시아가 한반도에서 끝까지 포기할 수 없었던 이 세 가지 전략적 이해를 감안하면, 일본과의 전쟁은 필연적이었다.
그렇지만, 러시아는 1904년 초 국가예산에 전비를 한 푼도 편성하지 않았다. 러시아 정부는 안일하고 오만했으며, 일본을 오판했다. 이와 달리, 중국 대륙은 물론 몽골까지 팽창을 목표로, 시베리아철도가 완공되기 전에 러시아와의 일전에 대비하며 군비를 확장해온 일본에게 러시아와의 일전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 이어 러일전쟁에서도 전비의 50% 가량을 영일동맹국인 영국과, 사실상의 동맹국 미국으로부터 충당했다.
1904년 2월 8일 15시 40분, 제물포에서 러시아 극동사령부가 있던 뤼순항으로 향하던 러시아전함 까레이츠(한인이라는 뜻)호는, 제물포로 입항하는 대규모의 일본 함대를 목격했다. 당시 러시아전함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일본 공사관이 이틀 전인 2월 6일에 철수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일본이 전신선을 이미 차단했기 때문이다.
2월 9일 오전 11시 45분부터 팔미도 앞 바다에서 일본군함의 발포로 러일전쟁 최초로 제물포해전이 일어났다. 청명한 날씨에 약한 남동풍이 불고 있던 그 날, 48분 동안 쏘아올린 천 여발의 포성은 서울까지 들렸다 한다. 러시아 루든예프함장은 이미 큰 손상을 입은 순양함 ‘바랴그’호와 포함 ‘까레이츠’호, 러시아여객선 ‘순가리’호를 일본측에 넘겨줄 수 없었다. 함장은 15시 30분에 바랴그호의 배수문을 열어 수장시키고, 까레이츠호는 폭파하고, 순가리호는 불을 지른 다음 수장시켰다. 이로써 제물포해전은 러시아 해전사에서 가장 장렬한 전투가 되었다.
팔미도 앞바다에서 시작된 러일전쟁은 1905년 5월 28일 독도 근방에서 종결되었다. 전쟁 초반부에 러시아의 태평양함대는 이미 궤멸되었으며, 흑해함대는 영국군에 의해 지중해로 내려올 수 없었다. 러시아에 남은 마지막 희망은 발트함대였다. 일본이 독도와 울릉도에 망루를 설치한 것은 바로 발트함대의 출항 결정이 이루어진 1904년 가을이었다.
발트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잔류해있던 태평양함대와 합류하기 위해 대서양,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7개월 반을 항행한 끝에 대한해협으로 진입했다. 발트함대가 대한해협을 통과할 것을 확신한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일본 전 함대를 대한해협에 집결시키고 임전태세를 완료했다(1905년 2월 21일). 일본의 독도 편입은 바로 다음 날인 2월 22일에 이루어졌다. 일본의 독도 탈취는 이렇듯 발트함대와의 최종 대결을 위한 전략적 목적에서 자행된 것이었다. 독도가 무주지였기 때문에, 일본의 고유영토이기 때문에 편입했다는 일본측 논리는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허구일 뿐이다.
일본은 이렇듯 자국에 유리한 국제관계라는 지렛대 삼아 한반도와 대륙으로 팽창했다. 일본의 우경행보의 뒤에도 열강을 등에 업은 이 같은 국제관계가 포진해있지는 않은 지 경계할 필요가 있다. 풍도와 팔미도에 각인된 일제 침략의 역사는 두 섬이 동북아 국제관계의 바로미터이자, 한반도 수호의 최전선임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하다.
석화정 공군사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