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21)신간회 창립 90주년을 돌아보며

2017년 올해는 신간회가 결성된 지 9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27년 2월 15일 창립된 신간회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민족협동전선’, 이른바 좌우연합의 성격을 갖는 민족운동 단체였다. 최근에 신간회기념사업회와 학술단체 및 언론사 주최로 <신간회 90주년-조선일보 지령 3만호 기념 학술대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신간회는 1931년 5월 신간회 해소대회 당시 전국적으로 140여개 지회에 4만여 명에 이를 만큼 최대의 민족운동단체였다고 할 수 있다. 경기지역의 경우 당시 서울을 포함하여 강화, 개성, 광주, 수원, 안성, 인천, 장호원 등에 신간회 지회가 조직되었다. 양평에는 신간회 본부의 직속 기관이 설치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서울과 인천지역이 경기도에 포함되었으나 여기에서는 현재의 경기도 지역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현재 31개 시군을 기준으로 하면 일부 지역이기는 하지만, 1930년 9월 현재 회원수는 광주 65명, 수원 243명, 안성 60명, 인천 116명, 개성 112명 등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신간회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일반 시민들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지역에 신간회가 있었는지, 어떠한 사람들에 의해서 무슨 내용을 가지고 신간회 운동이 전개되었는지 전혀 모른다.

신간회 수원지회는 1927년 10월 17일에 조직되었다. 그 중심은 3.1운동 및 이후 구국민단 등을 조직해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과 천도교 지도자, 기독교 관계자, 청년 사회주의자 및 교사 등이었다. 광주지회와 안성지회도 대체로 이와 같은 인적구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일제에 타협하려는 움직임이 자치운동으로 나려할 때 지회를 설립할 때 대회장에는 배석한 경관들이 연설 또는 의안 논의를 중지시키기는 등 엄중한 감시와 경계를 했다. 축사와 외부의 축전 및 축문을 낭독하는 것도 자유롭지 못했다. “단결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분투하자”라는 신간회 본부에서 특파된 사람의 강연은 처음부터 경관의 ‘주의’가 연발되더니 결국 금지되었고, 심지어 대회를 마치면서 하려던 ‘만세삼창’ 조차도 중지당했다. 극히 일부 지역이기는 하지만 이와 같은 탄압을 무릅쓰고 자동차로 시내를 돌며 선전방송을 하거나 ‘삐라’를 뿌리고 기를 높이 세우고 행렬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신간회 지회들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활동을 하고자 했을까? 이는 1927년 12월 안성지회에서 결의한 내용들에서 잘 드러난다. 지회에서는 노동자, 농민, 청년, 여성, 소년 각 부문운동을 지원하고, 문맹퇴치와 미신타파 등 생활인식의 변화 및 각 계급, 계층의 실태조사는 물론 그때그때의 정치사회문제에 대응하고자 했다. 신간회 광주지회와 수원지회, 안성지회 등은 ‘재만동포옹호’ 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원산총파업’을 응원하고 연대하였으며, 전국 각지의 수재 및 이재민을 위한 지원 활동도 하였다.

신간회 본부는 실질적인 활동 방침을 제시하지 못했다. 점차 지회들은 본부 측에 구체적인 활동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실제로 정기대회 시기를 이용하여 본부에 ‘건의안’을 제출하였다. ??중외일보??에 따르면, 안성지회는 1928년 2월 예정된 신간회 정기대회에 제출하기 위해 37개 항목의 건의안을 작성하였다.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 획득, ‘파벌주의자’ 배격, 봉건적 관습 폐지, 조선인 본위 교육 실시 등은 물론 소작권 및 소작료 문제, 노동시간 및 최저임금제, 고리대금 반대, 조선인 본위 상공업기관 조직 촉진, 학생의 과학사상 연구의 자유, 여성의 대우 차별 철폐, 사형제 폐지 등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 활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지역에서 신간회 지회의 이름으로 각 부문운동에 참여하기는 어려웠고, 대부분 부문운동 단체의 구성원의 자격으로 참여하였다. 실질적으로는 조정자 역할 그 이상에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일제 경찰의 탄압은 신간회 지회의 활동을 어렵게 했다. 회의를 비롯한 모든 모임은 경찰에 신고하여 허락을 받아야 했다. 회의 안건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대회를 금지시키고, 회의를 허락했다가 당일 취소하기도 하였다. 회의 때에는 사복 또는 정복 차림의 경찰이 항상 배석하여 진행과정을 감시하고 간섭했다. ‘망년회’ 조차 자유롭게 할 수 없었다. 수원의 인쇄소 노동자는 직공생활의 비참한 내막을 이야기 하다가 경찰에 의해 중지를 당했고, 용인군 기흥면의 농민은 농촌의 현실을 예로 들며 현사회의 문제점을 말하려다가 제지를 당했다. 경찰은 심지어 이 두 사람을 수원경찰서로 데려가 취조를 하기도 했다.

신간회 지회에 주요 참여자들은 누구였을까. 당시의 통계에 따르면 농민과 노동자가 다수였다고 하나 실질적인 활동의 중심은 지식인들이었다. 수원과 안성, 광주, 강화지회의 주요 지도자들 가운데는 신문기자로서 청년운동의 간부들이 많았다. 또한 지회장에는 대체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선출되었으나 전반적으로는 사회주의 성향의 청년들이 실질적인 헤게모니를 가지고 신간회 지회를 이끌어나갔다. 수원지회의 경우 1928년 중반 이후 청년운동단체를 매개로 사회주의자들이 신간회 활동을 주도했다. 하지만 조직 확대사업에 있어서는 천도교 지도자의 활동이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영향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931년 5월 신간회 제2차 전체대회는 신간회를 새로운 성격의 단체로 전환하기 위한 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신간회 해소가 가결되었다는 것이 곧 신간회 해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회에서 수원지회의 박승극과 공석정은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는데, 이들은 모두 신간회 해소를 주장하는 그룹이었다. 광주지회, 안성지회, 장호원지회, 인천지회의 대표자들도 본부 이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신간회 수원지회의 지도자이자 수원청년동맹과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수원지부의 집행위원장이었던 박승극의 ‘조선청년총동맹 해소’ 주장은 곧 신간회 해소 논의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일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도 신간회 해소 주장에 합류했다고 한다. 해소는 해체와 구별되는 것이지만 신간회 전체대회에서 신간회의 해소를 결정한 이후 경찰에 의해 일체의 집회가 금지됨으로써 해소대회는 실질적으로는 해체대회가 되고 말았다.

신간회 광주지회와 수원지회에서 활동했던 주요 지도자들 가운데는 신간회가 해체된 이후 지역의 공산주의자 단체 조직과 활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확인된다. 신간회 안성지회 윤인영(尹璘榮)은 조선공산당경기도전위동맹준비회에 관여했고, 신간회 광주지회장을 지낸 석혜훈(石惠勳)은 1935년 ‘광주공산당협의회’를 주도적으로 결성하였으며, 수원지회의 박승극과 변기재(卞基載) 등은 적색농민조합 및 ‘노농학원적화사건’의 주요 지도였다.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곳곳에는 일제에 의한 탄압의 현장과 함께 신간회를 비롯해 반일 민족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된 현장들이 남아있다. 현재 각 지방자치단체의 구도심지에는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의 주요 현장들이 많이 남아있다. 그러나 그 역사의 현장들은 이미 도시개발로 변형되거나 사라졌거나, 지금도 여전히 역사인식의 부재로 말미암아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 현실이다.

지금까지의 신간회 운동의 연구 결과들에 의하면, 신간회 지회가 지역에서의 민족운동을 조직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단계로까지 나아가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신간회 운동을 비롯해 일제강점기~해방공간의 ‘좌우합작운동’은 여전히 분단의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역사적 교훈을 남기고 있다. 전국적으로 신간회 운동의 현장을 역사지도로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화해와 협력이 필요한 21세기의 대한민국 경기도. 역사에서 답을 찾아가는 경기도민이 되자.

박철하 전 수원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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