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22) 1920~30년대 일제강점기 경기도 소작농민의 참상과 농민운동

▲ 소작료와 고리대금으로 집까지 잃게 된 소작농민의 참상 기사(동아일보 1927.12.13)
봉건사회의 지주-소작관계를 청산하지 못한 채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을 받아 식민지가 되어 버린 우리나라. 일제강점기 전 인구의 80퍼센트 이상을 차지한 농민들은 봉건적 생산관계와 일제의 식민 지배를 끝내고 근대적인 독립 국가를 세워야하는 역사적 과제를 떠안고 있었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 경기도 농민들의 실상과 농민운동의 양상은 어떠했을까.

경기도 지역의 농가경제는 호당 경작규모에 있어서는 다른 지역에 비해 양호한 편이었으나 소작농이 약 70퍼센트, 자소작농이 약 20퍼센트로 소작농의 비율이 높았다. 대지주들은 서울 등 외지에 거주하는 조선인도 있었으나 상당수가 동양척식주식회사 또는 그의 임대를 받아 경영하는 일본인들이었다. 이들 지역에서는 소작쟁의가 빈번했는데 수원, 진위(평택), 용인, 안성, 김포지역이 특히 심했다.



▶ 지주와 마름의 횡포



소작농의 생활을 어렵게 만든 것은 고율의 소작료와 마름의 횡포였다. 소작인들은 심한 경우 수확량의 70퍼센트까지 소작료를 비롯해 영농에 필요한 비용으로 지불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경작권을 위협받으며 불안정한 지위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다.

안성군 가사리에 사는 농민 59호(戶) 가운데 49호가 일본인 이민자의 토지를 소작하며 살았다. 과거의 역둔토가 일제의 식민지배 이후 동양척식주식회사로 넘어갔고 다시 일본인 이민자들에게 임대된 것이다. 어느 소작인은 수확량의 반을 소작료로 내고 나머지는 비료값과 기타 농사비용으로 빌린 돈을 갚으니 타작마당에서 곧바로 모든 게 남의 손으로 들어갔고, 그래도 부족하여 집까지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게 됐다며 하소연 했다.

뿐만 아니다. 한 마을의 소작인들이 모여 소작료 인하 운동을 했더니 지주는 농사철이 다가오는 때에 그들 모두의 소작권을 빼앗아 버리기까지 했다. 소작으로 근근이 삶을 이어오던 용인군 남사면 봉명리 소작인 50여 명은 살 길이 막막해졌고, 봉명리 마을 ‘존폐문제’까지 거론될 정도였다. 진위군 서탄면의 한 마을 일대 일본인 농장의 소작인들은 소작료 납입기한을 하루 넘겼다고 한 말씩 소작료를 더 내야 했고 소작권마저 빼앗겼다.

경기도 광주와 용인 등지에서 화전을 일구며 살다가 못하게 되어서 김포로 들어와 ‘새마을’을 건설하고 양동식산주식회사의 소작인으로 살던 농민들이 있었다. 80여 호에 300여 주민들은 수확량의 60~70%가 넘는 소작료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일 년 동안 피와 땀을 흘려서 농사라고 지어 놓아야 결국은 벼 한 톨 소득이 없으니 어디 살 수 있소. 할 수 없이 북간도로나 떠나겠소.” 게다가 농민들은 피폐되어 가는데 고리대금업자가 기승을 부렸다. 수확기 마다 ‘보릿돈’ ‘볏돈’에 곤경에 빠진 농민들은 더욱 생활이 어려워졌다. 일제강점기 경기도 내 소작인들의 현실은 이랬다.



▶ 농민들의 단체 결성과 쟁의



농민들은 삶을 영위해 나가고자 모여서 단체를 만들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냈다. 일제강점기의 농민운동은 소작농민을 중심으로 한 운동, 즉 소작쟁의 형식으로 나타났다. 소작인들은 단결하여 저항함으로써 지주로부터 소작조건을 개선하여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획득하고 일제의 식민지배정책에 대항하면서 민족의식의 형성 및 독립에 대한 열망을 키워나갔다. 따라서 농민운동은 봉건적 사회구조를 바꿔내려는 근대지향의 사회운동이자 동시에 일제의 식민지배정책에서 벗어나기 위한 항일운동의 성격을 갖는다.

3.1운동 이후 농민들은 자신의 이익과 사회변혁을 위한 농민단체를 결성하기 시작했다. 1924년에 전국적인 노동자와 농민단체의 연합으로 조선노농총동맹이 조직되었다. 이후 사회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민족해방운동의 성격이 크게 강화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농민운동은 비밀결사 형태의 혁명적 농민조합이 중심이 되어 식민지 수탈에 대한 대항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연계함으로써 정치적 경향을 크게 드러냈다. 즉 일제 식민지 지배 및 수탈 체제에 저항하면서 민족해방과 사회혁명을 지향해 간 것이다. 혁명적 농민조합은 일상에서 야학, 강연회, 독서회 등을 매개로 사회주의 교양사업을 벌여 계급의식과 민족의식도 함께 고양시켰다.


▲ 수진농민조합 지도자 남상환의 열결식 광경. 남상환은 1931년 겨울 적색농민조합 사건으로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 병보석으로 석방됐다는 기사

▶ 농민조합의 설립과 좌절

경기도지역의 대표적인 농민조합으로 수진(水振)농민조합을 꼽을 수 있다. 수원과 진위, 즉 지금의 평택지역을 아우르는 농민조합으로 주요 무대는 황구지천변의 서탄면과 양감면, 고덕면이었다. 1930년 10월 양감면 용소리와 정문리 일대의 소작인 100여 명이 지주의 무리한 소작료 요구에 저항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수진농민조합 쟁의부에서는 소작인들과 ‘소작료불납동맹’을 조직하여 적극 항쟁한 결과 소작쟁의를 승리로 이끌었다.

1930년대 전반기 비합법적인 혁명적 농민조합 조직의 확산과 함께 소작쟁의도 대부분 사회주의자의 지도 아래 전개되었다. 그들은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당재건운동을 전개하고자 했고, 이와 함께 농민운동은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으로 방향전환이 이뤄지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된 조건 속에서 1931년 11월 수진농민조합 지도자들 중심으로 ‘비밀결사’ 적색농민조합을 결성하고 개량주의 반대, 반제 반봉건 투쟁, 친목회 또는 두레 등에서 일상투쟁을 통한 조직화 등을 실행에 옮기려다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했다.

양평과 여주의 사회운동자들이 양평에 모여 적색농민조합을 결성하려다 일제 경찰의 탄압으로 실패한 사건도 있었다. 양평지역은 청년운동을 기반으로 사회운동이 활발했던 반면 여주지역은 당시 사회운동이 거의 없었다. 서로 다른 운동 기반 속에서 그들은 비밀리에 농민조합 결성을 준비했는데, 여주지역은 합법적인 농민계(農民契)를 중심으로, 양평지역에서는 비합법적인 적농반(赤農班)을 조직해 나갔다. 이재유(李載裕)의 자문을 받은 이들은 양평여주대표자회를 조직하여 교류하면서 각기 혁명적 농민조합을 조직하고자 노력하였으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연루되어 대다수 활동가들이 검거됨으로써 실현되지 못했다.

1931년은 조선청년총동맹과 신간회가 해소되고 혁명적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이 확산되던 시기였다. 특히 경기도의 수원과 양평지역은 청년운동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청총의 해소를 적극 주장하며 결의를 이끌던 지역으로 이곳의 농민운동은 당시 국내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의 흐름과 보조를 같이 하면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 김영상, 남상환, 박승극. (왼쪽부터)
▶ 경기도 농민운동의 지도자

일제강점기 경기도 지역의 농민운동 지도가 가운데 남상환(南相煥)을 기억하고 싶다. 그는 서울에서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엘리트로 서정리에 정착한 후 조선일보사 분국을 경영하며 사립야학교를 설치하여 미취학 아동들에게 무산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미 이때 현 사회제도를 변혁하고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진위소년동맹 진위청년동맹 서정리노동조합 수진농민조합 등의 조직에 앞장섰다. 그러면서 무려 20여 차례나 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그는 박승극(朴勝極), 김영상(金榮相) 등과 함께 수진농민조합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다가 1931년 11월 ‘적색농민조합사건’에 연루되어 일제 경찰에 검거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며 재판을 받던 중 폐병으로 고생하다가 1933년 3월 병보석으로 석방되어 송탄면 서정리 집으로 돌아왔으나 한 달 이레만인 4월 19일에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회운동에 함께 했던 동지들과 지역 주민들 600여 명은 1933년 4월 21일 영결식을 거행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수진농민조합에서 활동하면서 ‘비밀결사’를 조직했다는 이유로 1년 반 가까이 영어의 몸이 되었던 관련자들은 모두 같은 해 3월 28일 “증거가 불충분하고 비밀결사 조직의 혐의가 박약하다”는 내용의 무죄 판결을 받고 출소하였다. 남상환의 죽음은 일제에 의한 명백한 타살이었다.

일제강점기 농민운동은 사회변혁운동이자 민족독립을 지향하는 민족해방운동이었다. 농민운동의 상당수의 요구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을 비롯한 여러 민족운동 세력은 물론 사회주의운동 세력의 새로운 정부수립 계획에 반영되었다. 경기도 지역 저 너른 들판의 농토에는 일제강점기 때 삶을 영위하기 위한 농민들의 애절한 몸부림과 나라의 독립을 향한 뜨거운 열망이 함께 펼쳐져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박철하 전 수원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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