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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연의 풍수기행] 양평 이준경 묘…특출함 감춘 보국지세 순한 용의 氣품다

대혈이라고 하기엔 부족하지만 좌청룡 우백호 범상치 않은 터...보국 안 들판은 오히려 안정감
가문이 여러 사건서 화 당하자 큰 번성보다 안정의 뜻 담긴 듯

정경연 2017년 08월 03일 목요일
조선 중기 강직하지만 청백리로 추앙 받았던 동고(東皐) 이준경(1499~1572)의 묘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부용리 산35-1에 위치한다. 광주이씨(廣州李氏)로 고조부는 세조 때 우의정에 오른 이인손, 증조부는 세조 때 형조판서 이극감, 조부는 성종 때 폐비윤씨에게 사약을 전하였다는 이유로 갑자사화 때 사사된 예조판서 이세좌, 아버지는 홍문관 수찬으로 부친과 함께 사사된 이수정이다. 연산군 10년(1504)에 일어난 갑자사화 당시 이준경의 나이는 불과 6세였다. 그럼에도 한 살 위인 형 윤경과 함께 충청도 괴산 땅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광주이씨 집안이 크게 번창했다가 크게 화를 당한 것을 두고 풍수가들은 여주의 영릉 때문이라고 말한다. 영릉 자리는 본래 이인손의 묘지였다. 이 자리를 잡아준 지관이 집안이 크게 번창하더라도 묘를 크게 꾸미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를 지키다가 뒤에 가서 가문의 권력과 위세에 걸맞게 치장을 하였다. 그런데 그만 세종대왕릉 이장 자리를 찾던 안효례라는 지관의 눈에 띠고 말았다. 왕릉 자리로 정해지면 민간 묘들은 무조건 파묘를 해야만 했다. 물론 연하리의 좋은 자리로 이장을 했지만 새로운 자리에서 안정을 찾기까지 화가 미쳤던 것이다.

이준경은 아버지 없이 외할아버지 신승연 밑에서 자라며 학업을 닦아 중종 17년(1522)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된다. 그리고 중종 26년(1531) 식년문과에서 을과로 급제해 벼슬길에 나간다. 명종 3년(1548) 병조판서·한성판윤·대사헌을 역임했으나 영의정 이기의 모함으로 충청도 보은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풀려난 그는 함경도에 야인들이 침입하자 함경도순변사가 되어 그들을 타일러 물리쳤다. 명종 10년(1555) 전라남도 해남 달랑포에 왜선 60여척이 쳐들어온 을묘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도순찰사로 출정해 이를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우찬성에 올라 병조판사를 겸임하였고, 명종 13년(1558) 우의정, 15년(1560) 좌의정, 20년(1565) 영의정에 올랐다.

1967년 명종이 34세의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하성군 균을 왕(선조)으로 세우고 원상(院相)으로 어린 임금을 보좌하였다. 이때 기묘사화로 사사된 조광조의 신원을 복원하였고 노수신·유희춘 등 사림을 석방해 등용하였다. 그러나 고봉 기대승과 율곡 이이 등 신진사류들과는 뜻이 맞지 않았다. 선조 4년(1571)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가 물러나 이듬해 눈을 감았다.

이준경은 임종을 앞두고 선조에게 붕당의 조짐이 보이니 이를 경계하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서 율곡과 류성룡은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결국 율곡은 서인, 류성룡은 동인으로 동서붕당이 되고 말았다. 그는 을묘왜란을 진압하면서 왜구들이 반드시 재침할 것이라며 임진왜란도 예언하였다. 그러나 신진사류들은 태평시대에 무슨 왜침이고 양병이냐며 반박하였다. 결국 조정에서는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자기 자손들이라도 안전한 곳으로 피난하도록 하였다.

이준경은 후손들이 한꺼번에 크게 번창하는 것보다는 안정적인 발전을 바랬다. 그래서 자신의 묘 자리도 후손들이 큰 부귀를 하는 것보다 적당하게 부와 귀를 할 수 있는 곳으로 선택했다. 아마도 선조들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인지 그의 묘는 대혈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어느 것 하나 흠잡을 수 없는 자리다. 주산은 청계산(656m)에서 두물머리를 향해 내려오면서 솟은 부용산(芙蓉山, 362.8m)이다. 마치 연꽃이 강물에 떠있는 것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서 이준경 묘까지 직선거리로 2km 남짓 된다. 그 거리를 용맥은 온갖 변화를 다하며 기를 순화시키면서 내려간다. 용은 순하지만 기세가 있다.

용이 묘에 이르러 뒤에 커다란 입수도두를 만들어 기를 모아 놓았다. 그리고 좌우 아래로 선익을 뻗어 기가 옆으로 새나가는 것을 막았다. 앞에서는 순전이 받쳐주고 있어 단단한 혈장을 이룬다. 좌측 선익 자락에는 동고의 아들인 양호당 이덕열의 묘가 작은 혈을 맺었다. 이곳은 전체적으로 좌청룡과 우백호, 앞의 안산과 조산이 겹겹으로 감싸며 보국을 형성하였다. 보국 안의 들판은 작지만 평탄하고 원만하여 안정감을 준다. 명당의 물은 이준경 묘를 환포한다. 주변 산은 귀인봉, 일자문성, 노적봉 등 다양한 형태로 있으나 특출하지는 않다. 특출한 자손 대신 보통의 자손이 나와 가문을 만대까지 이어가라는 동고의 뜻이 담긴 것 같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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