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손 글씨 써본지 오래됐다는 사람이 많다. 대출서류 작성이나 휴대폰 구입 할 때 말고는 별로 글씨 쓸 일이 없다.

손으로 판결문을 쓰던 시절 어느 대법관은 판사를 평가하는 기준을 판결문 첫 글씨와 마지막 글씨가 똑같이 또박또박하면 높은 점수를 주었다고 한다. 오래 쓸수록 글씨가 날리기 때문이다. 긴장과 꼼꼼함이 법관으로서 중요한 덕목이라 판단했나 보다.

독일의 필적(筆跡)학자 빌헬름 프레이어는 “글씨는 뇌의 흔적”이라고 말했다. 글씨를 쓰는 신체의 모든 부분을 지배하는 것이 대뇌이기 때문이다. 필적학이란 어떤 사람의 글씨를 보고 그 사람의 성격을 추론하는 학문이다.

검사 출신 필적학자인 구본진 변호사는 “글씨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며 피조사자에게 자필 진술서를 쓰게 하였다. 글씨체를 보면서 그 사람의 인성이나 숨겨진 내면을 예측하곤 했는데 매우 적중률이 높았다고 한다. 그는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글씨를 분석한 책도 냈다.

친일파의 전형적인 글씨체는 크고 좁고 길며 유연하고 아래로 길게 삐친다. 글자 간격이 넓고 행 간격은 좁으며 꾸밈이 심하며 불안정한 필치를 보인다고 한다. 이완용은 명필로 알려져 있으나 꾸밈을 앞세운 가벼움이 느껴진다고도 했다.

백범 김구 선생과 안중근 의사의 글씨를 보면 서예의 문외한인 나도 웅혼한 기상과 기백을 느낀다. 특히 안 의사의 ‘國家安危 勞心焦思’라는 글씨와 손가락 일부가 없는 손바닥 도장을 보면 가슴이 뛰고 애국심이 치솟아 오른다.

주관적인 견해일 수도 있으나 글씨와 그 사람의 인성과는 상당한 연관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글씨는 곧 그 사람이다”란 말처럼 글씨를 보면 그 사람의 마음상태와 정진의 단계를 알 수 있다.

손 글씨가 점점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스마트 폰과 첨단기술이 손 글씨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뇌 과학 전문가들은 손 글씨를 쓰게 되면 정서를 안정시키고, 기억력을 높이고, 정신을 맑게 하여 인성을 향상시킨다는 효과가 검증되었다 한다.

교도소에서도 붓글씨 교육을 하는 걸 보면 틀린 얘기는 아닌 거 같다. 아무튼 똑바르고 힘찬 글씨는 보기에도 좋고 쓴 사람에 대한 믿음을 배가시킨다. 정치인들이 방명록에 써 놓은 글씨를 보면 그 사람을 평가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생긴 대로 행동하는 게 아니라 써 놓은 대로 행동한다.

병원에 입원한 고위 공무원을 문병간 적이 있었다. 그는 환자복을 입은 채 작은 붓으로 논어를 필사하고 있었는데 그 진지하고 삼엄한 모습에 놀란 적이 있다. 백 마디 말보다도 글씨를 정성들여 쓰고 있는 자세 하나로 그 사람의 인품과 성정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글씨체가 유전한다는 사실이다. 막내아들과 아내의 글씨가 똑 같은 것을 볼 때마다 DNA속에 글씨 유전자가 있음을 확신한다. 하기야 글씨가 곧 사람이니 글씨체가 유전하는 것은 당연하다.

최근 손 글씨 열풍이 불고 있다. 서점에 가 보면 필사 책들이 즐비하고 어려운 캘리그라피(서도, 서예라는 뜻)라는 용어를 써가면서 손 글씨를 장려하는 전문 서적도 많다. 만년필 판매량도 증가했다고 한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은 손 글씨도 예외가 아니어서 글씨를 쓰라고 강요해봐야 피곤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얼마 전 대기업 인사담당 임원으로 있는 친구에게 입사시험에 손 글씨 과목을 넣는 게 어떠냐고 말하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조상들에게 글씨는 의사소통의 수단이자 수양의 방편이기도 했다. 자신의 완성을 위해 글씨를 쓰고 또 썼다. 마오쩌둥은 책을 읽을 때 ‘부동필묵부독서(不動筆墨不讀書)’라고 붓을 들지 않는 독서는 독서가 아님을 강조하였다.

아무리 세월이 가도 우리가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다. 글씨만큼 개인이나 국가의 격(格)을 보여주는 것은 없다. 손 글씨와 갈수록 멀어져가는 우리의 어린 세대들 손에 펜을 쥐어주고 쓰게 하는 수고로움을 아껴서는 안 된다.

이인재 한국뉴욕주립대학교 석좌교수, 전 파주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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