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안 가져간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주말 광교산은 인산인해로 넘쳐났다. ‘단풍반 사람반’이라는 표현도 과하지 않을 듯 했다. 저수지 주변으로 막 물들기 시작한 단풍은 푸른색과 붉은색이 뒤섞여 아직 어설펐다. 반면 햇빛을 충분히 받은 쪽은 빨갛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한 해 동안 최선을 다해 살아온 나무들이 저마다의 고운 옷으로 갈아입고 떠날 채비를 하는 듯 보였다.

“아빠가 좋아하는 노래 나와요.” 옆에서 걷고 있던 아들이 이어폰을 건넸다. 핸드폰이 고장 난 아들은 내가 쓰던걸 받아서 쓰고 있다. 음악을 듣다가 전에 저장해 둔 노래가 나온 것이다. 익숙한 음이었다. 레드 제플린의 ‘천국으로 가는 계단(Stairway To Heaven)'이었다. 고2 무렵 처음 들었으니 벌써 30년이 다 됐다. 요즘도 가끔씩 듣는데 이맘때 특히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아들에게 씽긋이 미소를 지어줬다.

사람들이 많지 않는 통신대 쪽으로 코스를 잡았다. 밭둑 너머로 흰 살을 드러낸 무와 잎 떨군 감나무가 만추(晩秋)의 정취를 더했다. 길가에 핀 산국과 쑥부쟁이는 애처롭게 흔들렸다.

그 노래를 다시 들은 건 한달 쯤 전이었다. 취미로 밴드를 하며 알게 된 한 뮤지션에게서였다. 일렉기타를 하면 한번쯤 거치는 곡이기도 하지만 원곡을 넘어서는 연주력이었다. 일어나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얼마 후 다시 그를 만났다.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던 중 그는 뜻밖의 얘기를 꺼냈다. “판·검사나 의사는 일년에 몇 천 명씩 배출돼 사회의 주류가 됩니다. 하지만 연주자는 한 세대에서 손꼽히는 실력을 갖춰도 생활이 넉넉치 않습니다." 목소리에서 약간의 분노가 묻어났다. "우리나라는 철저하게 극소수 스타에만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됩니다. 나머지는 인생을 통째로 바쳐도 생계를 걱정해야 할 판이죠.” 잠시 숨을 멈춘 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씁쓸하고 안타까웠다. 그는 늘 닮고 싶은 대상이었다. 몇년 전 한 음악인이 생활고를 겪다 숨진 일이 떠올랐다. 인디밴드들에게는 우상이었지만 한 달에 100만원도 벌지 못했다. 제대로된 공연기회를 잡는 건 하늘의 별 따기. 어쩌다 무대를 서도 관객이 일정규모 이상 오지 않으면 공연료는 거의 받을 수 없었다. 상황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음악인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열정’ 하나로 힘겹게 버티고 있다.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회 각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사람들이 그런 대접을 받는다는 건 우리 사회의 프로세스가 잘못 작동되고 있다는 얘기다. 이들보다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지나치게 양극화된 현실을 그냥 시장논리에 맡겨 두기엔 임계치에 다다란 모습이다.

우선 대형 기획사나 거대 유통 플랫폼의 수익구조부터 정상화 돼야 한다. 이들은 콘텐츠 제작자 덕분에 돈을 벌면서 거꾸로 내 플랫폼 때문에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몇 해 전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켰던 싸이가 강남스타일로 얻은 음원수익이 3천6백만 원에 불과하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그렇게 엄청난 경우도 그 정도인데 다른 음악인들은 물어보나 마나다. 문제가 불거지자 수익률을 좀 더 올려줬다고 하는데 여전히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음원시장이 유통사 주도로 이뤄지다 보니 그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수익구조가 굳어진 것이다. 이는 음악뿐 아니라 뉴스 등 저작권을 가진 콘텐츠 전반의 문제이기도 하다.

더 큰 문제는 정부의 문화를 대하는 태도다. 1%의 한류에만 목을 매고 생색나는 곳에만 지원을 몰아주고 있다. 한류도 저변의 탄탄한 마이너가 있어야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지어놓고 사후처리에 골머리 앓는 체육시설은 그만 짓고 공연장이나 연습실 같은 문화예술 인프라를 폭넓게 확충해야 한다. 또한 문화예술인에 대한 실질적 지원책을 마련하고 관련 산업의 파이를 키워야 한다. 한국은 ‘아시아 16개국 중 재방문율 꼴찌’라는 오명을 안고 있다. 특별한 관광자원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의 재방문을 이끌려면 보고 즐길거리를 더 많이 제공해야 한다. 내수 진작도 마찬가지다. 제조업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문화소비가 일어나야 소득주도 성장도 이뤄지는 것이다. 이는 특히 일자리 창출과도 직결된다. 지난해 문화부 발표자료를 보면 공연 분야는 제조 부문보다 3~5배 정도 일자리를 더 창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화가 곧 돈이고 경제의 원동력 인 것이다. 

이제 곧 겨울이다. 더 이상 ‘춥고 배고픈’ 음악인들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해질녘 가을 산은 서늘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민병수/디지털뉴스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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