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나들이로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을 찾았다. 기실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예르미타시 겨울궁전에서 온 프랑스 미술전을 보러 간 것인데, 작품들을 감상하고 나오는 길에 새로 단장한 본관 서화관을 들러 흥미로운 전시 하나를 더 보게 되었다. 그곳엔 60년 만에 돌아온다는 무술년(戊戌年) 황금 개띠의 해를 기념하여 조선시대 화가들이 그린 개의 모습이 담긴 서화전이 열리고 있었다. 조선시대 세시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를 보면 새해가 되면 집집마다 개가 그려진 부적을 만들어 집안에 붙여두는 풍습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는 인류의 삶만큼이나 오래전부터 사람과 함께해온 개가 나쁜 기운을 물리쳐 준다는 벽사의 기운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 때문이라 한다.

서화 속의 개들의 표정을 나름 재미있게 보던 중, 한 그림에 시선이 멎었다. 18세기 조선 후기 도화서의 화원이었던 김득신의 작품이다. 거기엔 초가집 마당 밖의 오동나무 높은 가지에 둥근달이 걸려있고 그 아래, 달을 보고 짖는 개 한 마리와 싸리문 열고 나와, 개가 짖는 연유를 살피고 있는 아이가 묘사되어 있다. 제목이 ‘달 보고 짖는 개’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그림이라는 생각을 하다 꽤 오래전, 그 그림에 관한 어느 한 미술평론가의 맛깔나는 해제를 읽으며 혼자 키득거렸던 기억을 더듬어 냈다. 개인 소장품이라 사진으로만 볼 수 있었던 것인데 원작으로 대하니 흥감했다. 이 그림의 왼편에 이런 시가 적혀있다. ‘一犬吠 二犬吠 萬犬從此一犬吠 呼童出門看 月掛梧桐第一枝’ ‘한 마리 개가 짖자, 두 마리 개가 짖고, 만 마리 개가 이 한 마리 개를 따라 짖네. 동자더러 문 밖으로 나가 보라 하니, 달님이 오동나무 제일 높은 가지에 걸려있어요 한다.’ 이는 후한(後漢)의 유학자 왕부(王符)가 쓴 정치 논저인 잠부론(潛夫論)에 있는 ‘一犬吠形, 百犬吠聲’ 이란 속담을 변형시킨 것이다. 원래의 속담이 뜻하는 것은 이러하다. 한 마리 개가 어떤 속을 알 수 없는 ‘형(形)’, 즉 겉모양을 보고 짖는다. 이는 그 모양이 이상하고 두려워서 짖었을 수 있다. 무턱대고 그 소리를 따라 짖는 백 마리의 개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지만 마치 실상을 본 것처럼 짖는다. 이처럼, 세상이 시끄러운 이유는 덩달아 짖는 백 마리 개처럼 떠들어대는 사람들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한 사람이 헛되게 전하면 많은 사람들이 마치 자신이 실상을 본 것처럼 사실인양 떠들어 댄다’는 뜻이니 개 짖음을 당연히 부정적인 의미로 썼다. 그런데 서화에 쓰인 시는 다른 의미다. 달빛에 어른대는 오동잎의 그림자를 보며 컹컹 짖었을지도 모를 귀여운 개와 천진한 동자의 모습, 그림에는 보이지 않지만 소리만 듣고 덩달아 짖는 개들까지, 고적한 시골의 정취가 묻어나며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마치 ‘짖는 것이 개의 본업(?)인데 짖는 개가 무슨 죄가 있나! 속된 인간들이 문제이지’라고 하는듯한 김득신의 시는 일종의 패러디다. ‘패러디’란 이미 있는 말과 생각을 사용하면서 때로는 비웃음을 담기도 하며 그 본래의 뜻을 변형시키는 유희이다. 알던 것을 변화시키면, 새로 만든 것보다 훨씬 재미있다. 서화를 통해 이러한 패러디를 즐겼던 선조들의 여유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역사를 더듬어보니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고조선을 세운 기원전 2333년이 황금 개띠의 해요,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676년과 고려가 개국을 한 918년도 황금 개띠의 해였다. 그리고 이제 35일 후면, 백두대간의 심장인 평창에서 팡파르를 울리며 지구촌 겨울축제인 동계올림픽이 열리게 될 이 해 또한 황금 개띠의 해이다. 새해 첫날, 장엄히 솟아오른 영일만의 붉은 해를 마주했던 올림픽 성화는 오늘 경기도 남부에 들어설 것이다. 살가운 개처럼 눈밭을 뛰어 우리 곁으로 달려온 무술년, 대회의 성공과 더불어 국제사회에서 존경과 신뢰를 받을 수 있는 품격 있는 나라로 거듭나는 한 해가 되길 소망한다.

박정하 중국 임기사범대학교 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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