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9년(순조 9) 7월 28일, 고금도에서 22살의 젊은 여인이 바다에 몸을 던졌다. 곧이어 여인의 어머니 역시 딸을 따라 바다에 몸을 던졌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두 여인이 고금도 앞바다에서 고혼이 되었다.

22살의 젊은 여인은 경상도 인동(현재 구미시)에 거주하는 장현경의 딸이었다. 장현경은 영남 유림의 거두인 여헌 장현광의 후손으로 인동지역에서 생불(生佛)이란 평가를 받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던 명망있는 사대부였다.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돌아가시자 장현경은 크게 낙심하고 3년 국상을 경건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삼년상이 끝나기 전에 인동부사 이갑회의 초청을 받아 관아에 가니 아버지 회갑이라 하여 수령이 기녀들을 불러놓고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장현경은 국상 중에 술을 마시고 잔치를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호통을 쳤다. 이 일로 인동부사 이갑회는 장현경에 악심을 품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 온 장현경에게 그의 부친은 정조가 종기로 치료받을 때 당시 우의정이던 심환지가 내의원 소속의 약원 심인에게 독약으로 정조를 죽이게 하였다고 하였다. 아버지로부터 정조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장현경은 인척들과 함께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이갑회가 역모사건으로 조작하여 조정에 보고하였다. 결국 장현경은 역적으로 몰려 스스로 자결하였다.

순조를 대신해서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는 조작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장현경의 아내, 13살과 5살인 두 딸과 겨우 1살이 지난 아들을 관노로 만들어 고금도로 유배를 보냈다. 고금도는 전라도 강진 앞바다에 있는 섬으로 대역 죄인들이 유배를 가던 척박한 땅이었다. 특히 고금도의 군졸들은 거칠기 그지 없었다. 장현경의 큰 딸은 미모가 있어 성장하면서 고금도 군졸 한 명에게 성적 학대를 당하기 시작했다. 이 군졸은 자신에게 몸을 바치지 않으면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괴롭히겠다고 협박하며 장현경의 큰 딸을 겁탈했다. 장현경의 큰 딸은 22살이 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성노예가 된 것이다. 군졸은 저항하는 여인에게 “네가 비록 거절한다 해도 끝내는 나의 처가 될 것이다”라며 협박을 일삼았다. 마침내 이 장현경의 큰 딸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자결하려고 바다로 나아갔다. 이 소식을 들은 어머니와 여동생이 뒤쫓아 갔지만 큰 딸은 어머니의 간절한 호소에도 푸른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러자 어머니는 하늘을 보고 자신 역시 바다에 몸을 던지려고 하였다. 14살의 둘째 딸이 같이 죽으려 하자 어머니는 “어린 남동생을 부탁하려니 너는 죽지말라”고 말한 후 바다로 몸을 던져 큰 딸과 함께 바다의 넋이 되었다. 이 순간 바다에서 거센 바람이 불고 큰 해일이 일었다. 그리고 이듬해 7월 28일에도 거센 바람과 해일이 불어 고금도 사람들은 장씨 여인들의 피맺힌 한(恨) 때문에 생긴 바람이라고 하여 ‘처녀풍’이라고 불렀다. 아무 힘도 없는 여인이 군졸의 폭력과 협박에 의해 지속적인 겁탈을 당하고 끝내 죽음에 이른 것이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사건은 강진현만이 아닌 전라도 감영에까지 소식이 전해졌다. 전라도 관찰사는 강진현감 이건식에게 관리 소홀로 죄를 주려고 하자 이건식은 조사를 나온 전라감영 비장에게 천냥의 뇌물을 주어 보고서를 조작했고, 큰 딸을 능욕한 군졸도 아무 피해를 입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 암행어사 홍대호도 이 사연을 상세히 들었지만 그냥 모르는 척 하고 돌아갔다. 권력을 가진 이들이 힘없는 여인의 성폭행으로 인한 죽음을 덮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강진에 유배가 있던 다산 정약용은 분노하며 이 사실을 기록해 놓았다.

최근 서지현 검사가 상사들로부터 성추행을 당하고, 사과를 받으려 하였지만 끝내 사과를 받지 못했던 사실을 밝혔다. 매우 용기있는 행동이다. 이 일로 인하여 성적 학대를 당한 사실을 고발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있었서는 안된다는 미투(metoo)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남성중심의 사회가 지속되어 여인들에게 억압과 굴레를 주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남성 상사들과 동료들의 성추행이 계속 되어왔다. 이제 미투 운동을 통해 한국 사회는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이번 서지현 검사 사건에 대해 철저한 진상 조사와 그 결과에 따라 가해들에 대한 법적 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 사회는 남성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김준혁 한신대학교 정조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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