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9월 22일 오후, 일본 자객들에 의해 희생된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에 갑자기 회오리 폭풍이 불었다. 회오리 폭풍으로 거센 먼지가 가득해 사람들이 앞을 바라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시간 홍릉에서는 미국에서 온 귀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고종의 특명으로 외교 담당 고문인 독일 여인 엠마 크뢰벨(Emma Kroebel)과 조선 관료들이 먼지 가득한 곳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먼지 바람 가운데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말을 타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 무리 선두에 위세 당당하게 말을 타고 들어오는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자주색의 긴 승마복을 입었고, 승마용 채찍을 한손에 들고 입에는 시가를 물고 있었다. 이 여인은 바로 미국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인 엘리스 루즈벨트(Alice Roosevelt)였다.

엘리스는 홍릉을 방문하기 3일전인 9월 19일 미국 전함 오하이호를 타고 제물포 항에 도착했다. 엘리스는 조선으로 오기 전에 일본에서 메이지(明治) 왕을 만나고, 중국 서태후를 만났다. 그녀와 함께 온 사람은 미국 국방장관 태프트로 그는 일본에서 수상인 카쓰라와 만나 비밀 협약을 체결하였다. 그것은 바로 ‘카쓰라-태프트 밀약[The Katsura-Taft Agreement]’으로 미국이 필리핀의 식민 지배권을 갖고 일본이 조선의 식민지배권을 갖는 것을 합의한 것이다. 이 비밀 협약을 전혀 모르는 고종은 미국 대통령의 딸을 공주로 생각하여, 미국 공주 엘리스가 일본으로부터 조선을 지켜줄 것이라 확신하고 국빈으로 환대하였다.

고종은 제물포에서 특별 열차로 엘리스를 서울로 오게 하였는데, 그 열차에는 태극기와 미국 국기 그리고 일본 국기가 가득했다. 대한제국의 황제가 초청하는 것 같지만 특별열차에 일본 국기가 가득 걸려있는 것을 보고 미국 대통령 딸의 방문이 실제로 일본에 의한 것임을 삼척동자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고종은 서울역에서 엘리스를 황실 근위대와 황실 군악대로 마중했고, 각국의 공사들을 초청해서 환영하게 하였다. 그리고 엘리스에게 황실 가마를 제공하고, 수행원들에게도 가마를 제공하였다.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이후 최고의 예우를 갖춘 환대였다.

고종은 엘리스를 위해 궁중에서 초청 연회를 베풀고 이어서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에서 연회를 베풀게 하였다. 그 의도는 일본인에 의해 시해된 명성황후의 죽음을 엘리스가 알게 하여 일본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게 하고자 함이었다. 그래서 실제 엄숙한 제사만이 지내졌던 왕릉에서 연회를 베풀게 한 것이다. 그러나 엘리스는 고종의 뜻과 달리 일본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품지도 않고 대한 제국 황실에 대한 예우도 표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한 제국의 그 어느 누구도 감히 올라탈 수 없는 홍릉의 석마와 석양에 올라타고 장난을 치며 황실을 욕보이는 행동을 하였다. 그리고는 남자친구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소리를 쳤다. 그곳에 있던 조선인들은 그녀의 행동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결례라고 생각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엘리스의 장난을 막지 못했다. 미국의 공주로 불린 엘리스가 아시아의 힘없는 국가 대한제국을 너무도 우습게 알았던 것이다. 이처럼 대한제국을 우습게 여긴 미국은 일본과 연대하여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드는데 동조하였다.

미국 공주로 예우를 받던 대통령의 딸인 엘리스가 방한한지 112년 만에 또 다른 미국 대통령의 딸인 이방카 트럼프 (Ivanka Trump)가 내일 평창올림픽 폐막식 참가를 위해 한국을 방문한다. 그녀는 트럼프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백악관 선임고문의 직책을 맡고 있다. 과거 엘리스는 아무런 직책이 없던 반면 이방카는 백악관 선임고문으로 미국 행정부의 정책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정부는 실용적인 외교를 위해 이방카에게 절제되면서도 품격있는 예우를 해야 한다. 이방카가 미국의 이익을 우선하고자 하겠지만 우리 정부는 그녀에게 남북관계 개선과 북미관계 개선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이를 아버지 트럼프에게 전달하여 한반도의 평화에 기여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미국의 동의와 중국의 지지가 있어야 남북정상회담을 할 수 있는 한반도의 현실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평창 올림픽을 통해 한반도 평화를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최대한 잘 활용해야 한다. 우리 국민들은 엘리스 루즈벨트와 전혀 다른 미국 공주 이방카 트럼프를 기대한다.

김준혁 한신대학교 정조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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