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와 저주의 막말들이 난무하는 걸 보면서 선거철을 실감한다. 막말은 이제 일상적인 정치언어가 되다시피 했다. 경쟁적으로 막말을 쏟아내니 도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막말 퍼레이드를 벌인다. 모처럼 불고 있는 한반도 평화바람에도 여지없이 ‘쓰레기’, ‘정치쇼’라는 막말을 쏟아낸다. 그에 질세라 여당 대표는 야당을 향해 ‘청개구리’라고 쏘아붙인다.

두렵고 무섭다. 동시대인으로서 수치스럽기도 하다. 유령처럼 떠도는 혐오와 증오의 말들이 세상을 더욱 어둡게 한다.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그리도 험한 말들을 쏟아내는가. 어느덧 우리는 세상을 환멸하고 욕하고 저주하는 데 익숙해졌다. 사람을 향한 말도 마찬가지다. 거침없이 저주의 말을 해댄다. 어떤 이는 맞아도 싸다거나, 죽어 마땅하다거나, 천벌을 받아야 한다거나. 어떤 이는 그 자리에 앉을 깜냥이 안 된다거나. 기업은 망해야 하고, 노동‘사회운동을 하는 사람은 불순세력이고, 심지어 자식 잃은 슬픔에 잠긴 세월호 유가족에게 조롱과 경멸의 말들을 늘어놓기도 한다.

알겠다. 화나는 것 알겠다. 분노도 알겠고, 열패감도 알겠다. 그러나 막말을 늘어놓는다고 그 화가 풀리겠는가. 그런다고 득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대체 뭐가 달라지겠는가. 제발 조금씩만 덜어내고 조금씩만 진정하자.

말은 말하는 사람의 인격을 드러낸다. 말의 내용과 그에 담긴 정보는 말하는 사람에 대한 인격에 따라 변질된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말하는 사람에 대한 신뢰와 존경이 없다면 그 말은 죽은 말이다. 특히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할 때는 말하는 사람의 본성이 드러나기도 한다. 사람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사람은 제아무리 유려한 말솜씨를 뽐낸다 해도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불신과 혐오를 불러올 뿐이다. 그걸 모르는 바보들이 앞뒤 안 가리고 남의 험담을 늘어놓다가 사람을 다 잃고 만다.

우리가 평생 하는 말 중에서 반 이상이 나 아닌 남을 평가하는 말이라고 한다. 사실 말이 좋아 평가이지 실제로는 험담이거나 모함이기 일쑤다. 특히 당사자 없는 데서 하는 말은 위험하다. 건전한 말하기와 듣기는 지식과 지혜의 향연이다. O. W. 홈스(Oliver Wendell Holmes, Jr.)의 말마따나 “말하기가 지식의 영역이라면, 듣기는 지혜의 특권”이다. 말로 지식을 뽐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말을 지혜롭게 새겨듣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지식과 지혜의 주고받음이 아닌 말하기와 듣기는 수다에 지나지 않는다. 수다는 곧 남의 뒷담화로 이어진다.

“폴이 피터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피터보다 폴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된다.”는 스피노자의 말이 더 귀하게 들리는 이유다. 결국 말하기와 듣기는 한 몸이다. 누군가에게 말을 하는 것은 그의 말을 듣고 싶다는 의사의 표현이다.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말을 듣는 것은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다는 의중을 드러내는 것이다. 주고받는 말의 내용이 곧 그들의 인격과 성격이다.

험담은 최소한 세 사람을 죽인다. 험담하는 본인과 험담의 대상자, 그 험담을 듣는 사람. 살기 위해 이 세상에 왔거늘 왜들 그리 서로를 죽이려 하는가. 여럿이 더불어 살아야 한다. 그러라고 받아둔 선물이 산더미를 이룬다. 밝고 빛나는 삶을 살라고 불을 선물 받았고, 둥지를 짓고 살라고 지구라는 아름다운 터전에 왔다. 소통하고 공감하라고 수도 없는 생각을 말과 글로 벼려왔다. 그 모든 고귀한 선물을 왜들 그리 엉망으로 탕진하는가. 왜들 그리 증오와 환멸의 삶을 살려고 하는가.

사람들을 붙잡고 현실의 문제들을 논하라고 하면 끊임없이 부정의 말을 쏟아내지만, 정작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아이디어를 내달라고 하면 머뭇거리기만 한다. <세상을 바꾼 비이성적인 사람들의 힘>(존 엘킹턴, 파멜라 하티건 공저)에서 지적하는 말이다. 부정의 말에는 익숙하지만 긍정의 신호를 내는 데는 서툴다.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이다. 나의 말이 곧 나의 정체성이다. 나의 혐오가 또 다른 혐오를 부르고, 나의 바름이 올바른 관계를 만든다. 특히나 사람의 관계는 말투로 시작된다. 기분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한다면 배려의 말투부터 익혀야 한다. 말이 고우면 비지 사러 갔다가 두부 사 온다. 비단이 곱다해도 말같이 고운 것은 없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

최준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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