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가 BH(청와대)의 원활한 국정 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최대한 협조해온 사례’라는 문구가 법원행정처 전직 간부들의 컴퓨터에 저장된 파일들 속에서 나왔다.

사법권의 독립은 헌법에 명기된 기본 명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법부 스스로가 삼권분립 정신에 위배하면서 청와대에 추파를 던진 동기는 ‘상고법원 설치’를 위해서였다고 한다.

대법원은 연간 4만 건이 넘은 사건이 폭주하고 있어서 대법관 1명이 매년 3천600건 이상의 사건 처리를 담당하고 있다. 초능력자가 아니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대법원은 위와 같은 업무 폭주로 인한 난관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 1994년 ‘상고심 절차에 관한 특례법’을 도입하여 ‘심리 불속행 제도’를 운영해 오고 있다. 심리불속행이란 민사나 가사· 행정· 특허 분야 상고사건에서 상고이유에 관한 주장이 헌법이나 법률, 대법원 판례 위반이나 중요한 법령위반에 관한 사항 등을 포함하지 않는 경우 더 이상 심리하지 않고 상고를 기각하는 제도이다. 이는 상고이유서에 대한 구체적인 판결 이유를 생략한 채 몇 줄짜리 형식적 문구로 상고를 기각해 버리기 때문에 당사자나 변호사 입장에서는 과연 대법원이 제대로 기록을 검토하고 심리하고 있는지 의심하면서 법원을 원망하게 되는 것이다. 2017년 대법원이 처리한 민사 본안 사건 중 77.2%가 심리불속행 기각으로 종결되었고, 행정사건 불속행 기각률은 76.4%이며, 가사 본안사건 심리불속행 기각률은 86.8%에 이른다고 한다.

당연히 국민들과 변호사단체에서는 위 원성 높은 심리불속행 제도의 개혁을 요구하며 왔는데 이에 대한 여러 해결방안 중의 하나가 대법원이 제시한 ‘상고법원설립’이었다. ‘상고법원’제도는 대법원과 항소심 법원 사이에 상고법원을 두고 상고심 판사가 대부분의 3심 사건을 처리하고 대법원은 중요사건만 판단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대법원은 위 상고법원이 폭주하는 3심 사건을 해결하고, 고위법관들의 인사적체도 해소할 뿐만 아니라 대법원의 권위를 계속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제도의 맹점은 대부분의 3심 재판을 대법관이 아닌 상고심 판사가 담당하기 때문에 사건 당사자가 납득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대법원은 대법원 행정처를 총동원하여 입법안을 통과시키고자 노력했다. 심지어 전국 각 법원에 대대적으로 홍보를 지시하여 언론사 임직원을 초청하여 대법원 건물 내에서 식사제공 하기, 판사들이 자전거를 타고 홍보하기, 지하철 광고하기, 유명 포털사이트 광고하기, 공정성을 잃은 설문을 통한 여론 조사하기 등 상고법원 홍보에 국민의 혈세를 쏟아붓는 모습을 보여 왔다고 비난받기도 하였다. 전국 각 법원에 대한 국정감사에서는 지방법원장이 해당 지역 지방자치단체장에게 무리하게 상고법원 홍보를 요청하는 등 법원의 상고법원 홍보 형태가 도를 넘었다는 질책이 쏟아지기도 했다. 대한변호사협회는 상고법원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괴이한 형태이고, 최고 법원을 대법원으로 규정 한 헌법에도 어긋나며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고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런 연유로 인하여 최근에 이르러서 대한변호사협회에 대한 압박방안 등을 포함한 대책문건까지 불거진 것이다.

결국에는 상고법원 추진은 무산되었다. 그러면 무엇이 그 해결방안인가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종래에 ‘상고 허가제’는 1981년에 시행하였지만 국민의 3심 재판을 받을 권리를 제한한다는 여론 때문에 1990년에 폐지되었다. 또 ‘대법원 판사’를 임용해 사건을 처리하자는 의견도 있으나 그것은 입법이 무산된 상고법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법원 상고심 재판제도 개선으로 가장 간명한 방법은 하급심 심리를 강화하여 상고사건 자체를 감소시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래도 상고사건이 줄지 않는다면 대법관 수 자체를 증원하고, 독일 등처럼 행정, 노동 등 각 분야별로 다양한 상고심 법원을 두어 대법관 수 자체를 늘리는 방안도 검토해 볼 수 있다. 다만 대법관 수가 많아지면 전원합의체 사건에 있어서 통일된 결론을 표출하는 대법원 기능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대법원 개혁은 행정 편의주의적 발상에서 이루어져서는 아니 된다. 그 개선방안이 합리적이고 국민권리 친화적이라면 청와대에 로비할 필요도 없고 과도한 홍보가 아니더라도 국민· 변호사단체에서도 환영을 받을 것이다. 이번 재판거래 의혹은 국민 가슴에 피멍을 들게 하고 있다. 나아가 사법 불신을 가중시키고 사법부 존재 자체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 요컨대, 상고심 개혁은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에 초점을 두고 그 방안이 추진되어야 한다.


위철환 전 대한변호사협회 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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